2022.7.5.화요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1821-1846) 기념일
2역대24,18-22 로마5,1-5 마태10,17-22
순교적 삶
-“어떻게 살 것인가?”-
어제 받은 미사예물 봉투의 거친 글씨의 두 미사지향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어느 장로와 전도사의 “시냇가 교회(노숙인들) 사목, 간경화 환자들이 많습니다. 보호기도 부탁드립니다”의 미사지향과, “위암말기로 투병중에 있는 형제를 위한” 생미사 지향이었습니다. 요즘 알게 모르게 참 많은 사람이 세상을 떠나는데 거의 내전內戰 수준입니다. 전쟁시기가 아니지만 전쟁 못지 않게 많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사유로 죽음을 당하거나 맞이합니다.
한번뿐이 없는 소중한 삶, 저절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라는 물음에 직면하게 됩니다. 우리는 참 고맙게도 이에 대한 답을 가톨릭 교회의 살아 있는 보물인 성인들을 통해 찾습니다. 참으로 파스카의 예수님을 추종하다 순교의 죽음을 맞이한 영원한 회개의 표징, 희망의 표징, 구원의 표징이 되는 순교 성인들입니다. “순교는 성체와의 결합이다”라는 말마디도 새롭게 떠오릅니다.
오늘은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신심미사를 성대하게 봉헌합니다. 특히 작년 2021년은 성인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였고, ‘2021년 유네스코 세계 기념 인물’로 선정된 뜻 깊은 해이기도 했습니다. 참 신기한 것이 죽으셨지만 주님 안에서 살아 계신 듯, 현존감을 느끼는 성인들입니다. 말그대로 “에버 오울드, 에버 니유(ever old, ever new)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롭게 우리 마음에 와닿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답을 주는 성인들입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의 삶과 죽음도 늘 새로운 감동과 충격으로 마음에 와닿습니다. 1821년에 태어나 1846년에 순교하셨으니 만25세 참 짧은 생애였으니 성인에 비하면 저는 무려 성인의 세배를 살고 있는 셈입니다. ‘얼마나’가 아닌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대한 물음이 절박하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방금 부른 성인에 관한 대표적 입당성가 287장은 성인이라 일컸던 ‘천상天上의 도반道伴’같은 사제, 최민순 작사와 이문근 작곡의 아름다운 작품으로 들을 때마다 감동을 선사합니다.
“서라벌 옛터전에 연꽃이 이울어라, 선비네 흰옷자락 어둠이 짙어갈제
진리의 찬란한 빛 그몸에 담뿍안고, 한떨기 무궁화로 피어난 님이시여.
한강수 굽이굽이 노들이 복되도다, 열두칼 서슬아래 조찰히 흘리신피
우리의 힘줄안에 벅차게 뛰노느니, 타오른 가슴마다 하늘이 푸르러라.”
순교성인들의 DNA를 전수받고 순교적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5절까지 매절마다 감동이지만 1절과 4절만 옮겨 봤습니다. 성인의 순교 20일전 마지막 스무번째, 라틴어 원본에서 번역된 유언과도 같은 감동적인 장문의 옥중 서간 일부도 나눕니다.
“저의 어머니 우르술라를 주교님께 부탁드립니다. 저의 어머니는 10년 동안 떨어져 있던 아들을 불과 며칠 동안만 만나 보았을 뿐인데 또 다시 갑작스럽게 잃고 말았습니다. 슬픔에 잠긴 저의 어머니를 잘 위로하여 주시기를 주교님께 간절히 바랍니다. 이제 저는 진정으로 주교님의 발아래 엎드려 지극히 사랑하올 아버지이시고 지극히 공경하올 주교님께 마지막 하직 인사를 드립니다. 이 다음에 천당에서 다시 만나 뵙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감옥에 갇힌 탁덕 김 안드레아가 올립니다.”
절박하게 마음에 와닿는 순교성인들의 죽음입니다. 죽음은 삶의 요약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물음은 저절로 ‘어떻게 죽어야 하나?’ 물음으로 직결됩니다. 말그대로 영적전쟁의 순교적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참으로 하느님 자녀답게 존엄尊嚴한 인간 품위를 유지하며 한결같이 살아가는 것이 관건입니다.
늘 말씀드리는 바대로 우리 믿는 이들은 영적전쟁의 삶에서 제대가 없는, 죽어야 제대인, 살아있는 그날까지 싸워야 하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들입니다. 오늘 말씀이 주님의 전사들인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바, 바로 하느님께 대한 궁극의 희망과 지극한 인내의 믿음입니다. 지극한 인내의 믿음을 가능하게 하는 결정적 요소가 성령과 희망입니다. 제2독서 로마서가 이런 희망에 대해 좋은 깨우침을 줍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선물이 바로 신망애信望愛 향주삼덕向主三德입니다. 백절불굴의 믿음, 희망, 사랑으로 순교적 삶에 항구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성령의 힘, 하느님의 힘 덕분입니다. 오늘 복음의 두 대목이 이를 입증합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아버지의 영이 너희에게 일러줄 것이다.---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새삼 성령은 우리의 궁극의 희망이요 지극한 인내의 믿음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성령과 희망, 인내의 믿음이 사라졌을 때 배은망덕한 우상숭배의 변절變節의 삶입니다. 바로 이의 반면교사가 바로 제1독서에서 은인恩人 여호야다 사제의 아들 즈카르야 예언자를 죽인 요아스임금입니다. 마지막으로 즈카르야는 순교직전 요아스 임금에게 미구에 있을 불행을 선언합니다.
“너희가 주님을 저버렸으니 주님도 너희를 저버렸다. 주님께서 보고 갚으실 것이다.”
결국은 주님을 저버렸기에 주님께 저버림을 당한, 스스로 자초한 심판의 불행한 죽음임을 깨닫습니다. 순교적 영적 삶에 비약이나 도약은 없습니다. 우리의 사부 성 베네딕도의 말씀대로 하루하루 날마다 깨어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살면서, 주님과 신망애信望愛의 관계를 날로 깊이함이 유일한 처방이자 답임을 깨닫습니다. 무엇보다 날마다의 이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보다 순교적 삶에 도움이 되는 것은 없습니다. 끝으로 ‘늘 읽어도 늘 새로운’ 제 좌우명 기도시, 마지막 고백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찬미받으소서.”
혼자가 아닌 주님과 도반들과 함께 이런 파스카의 여정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문제는 나에게 있고 답은 주님께 있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을 향한 부단한 자아초월自我超越의 비움과 겸손의 순교적 삶이 유일한 처방의 답임을 깨닫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