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11.금요일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학자(316-397) 기념일
이사61,1-3ㄹ 마태25,31-46
최후심판
-심판의 잣대는 사랑-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축일, 아침 성무일도 찬미가가 참 아름답습니다.
"경건하고 모없이 슬기로와서, 겸손으로 티없이 보낸 생애여,
주께받은 생명을 꽃피웠으니, 그향기를 만세에 남기었도다."
사랑은 동사입니다. 구체적 행위로 표현되어 검증되는 사랑입니다. 요한 1서 말씀도 생각납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3,18). 어제의 사랑도 잊지 못합니다. 어느 착한 자매님이 제 졸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책이 좋다하여 품절된 책을 복사 제본하여 그 무거운 책들을 가져왔습니다. 우선 ‘평화의 집’ 피정집 10개의 방에 넣으려 합니다. 오래 지나다 보니 비치했던 책들이 다 사라졌습니다.
이 또한 동사로 표현된 사랑입니다. 평범한 사실을 새벽 강론을 쓰면서 새롭게 깨닫습니다. 새삼 진리는 세월에 색깔 바래지 않고 늘 새롭게 빛남을 깨닫습니다. 사랑이 진리입니다. 참 사랑은 진리 안에서의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입니다. 최후심판의 잣대 역시 사랑입니다. 성 마르티노의 전생애를 통해 확연히 드러나는 사랑입니다. 심판의 잣대이자 성덕의 잣대인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오늘은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인데,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기념일이 아닌 축일로 지냅니다. 성인이 수도승 출신 주교인데다 베네딕도 수도회와의 각별한 인연 때문입니다. 성 마르티노 주교에 관한 일화들을 소개합니다. 프랑스 수호성인으로 큰 공경을 받고 있는 마르티노는 항가리 출신으로 이태리에서 어린시절을 보냈으며 후에 군복무중 프랑스에서 퇴역하여 은수생활을 시작하여 마침내 투르의 주교 수도승으로 활약하게 됩니다. 당시 한나라와 같은 로마제국 유럽 전체가 성인의 활동 주무대였음을 봅니다. 파란만장한 삶중에도 만81세까지 장수하셨으니 새삼 인명은 재천임을 깨닫습니다.
-술피기우스 세베루스가 전하는 성인의 임종어 역시 감동적입니다. 불화한 성직자들의 화해를 이루고 수도원에 돌아가려던 중 병에 걸려 위중한 상태가 되었을 때,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하는 이들을 보며 주님께 기도합니다.
“주님, 아직 당신 백성이 저를 필요로 한다면, 계속 일하는 것을 거절치 않겠습니다.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당신이 계속 함께 해 달라는 성직자들에게,
“그냥 두시오. 땅보다 하늘을 더 바라보고 싶습니다. 이제 여행을 떠나는 순간에 이 내 영혼은 하느님께로 향하고 있습니다.”
가까이 있는 악마들을 향하여는,
“피에 얼룩진 짐승아, 너는 여기서 무엇을 하느냐? 이놈아, 네가 받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아브라함의 품이 나를 받아들이고 있다.”
이 마지막 임종어를 남기고 성 마르티노는 자신의 영혼을 온전히 하느님께 맡겨 드립니다.-
성 베네딕도 이전에 서방 수도원 제도를 개척한 탁월한 지도자 성 마르티노였고, 순교자가 아니면서 성인이 된 최초의 인물이었습니다. 특히 성인을 성소에로 이끈 다음 전설적 일화는 너무 유명합니다. 늘 읽어도 흥미진진하고 새로운 느낌입니다.
-성 마르티노는 자신이 속한 부대가 프랑스의 아미앵 근처에서 주둔하던 어느 추운 겨울날, 거의 벌거벗은 채 추위에 떨면서 구걸하는 한 걸인을 만납니다. 당시 가진 것이라고는 입고 있던 옷과 무기밖에 없었기에 칼을 뽑아 자기 망토를 두 쪽으로 갈라 그것을 절반으로 갈라 그 반쪽을 걸인에게 나눠주었습니다.
그날 밤, 꿈에 자기가 걸인에게 준 망토를 입은 예수님이 나타나, “아직 예비신자인 마르티노가 이 옷을 나에게 입혀 주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고, 이 신비체험후 마르티노는 18세에 세례를 받았고 얼마간 군대생활후 제대합니다.-
바로 이런 구체적 행위의 사랑이 그 사랑의 진정성을 입증합니다. 이런 일화 때문에 오늘 최후심판 이야기가 복음으로 채택된 것 같습니다. 오늘 최후심판은 구체적 사랑의 행위로 이뤄집니다. 기도를 많이 했느냐, 수행생활을 많이 했느냐, 신학지식이 많으냐가 아닌 구체적 사랑을 실천했느냐가 최후심판의 잣대입니다. 종파를 초월하여 모든 민족의 사람들이 최후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최후심판에 통과한 의인들에 대한 주님의 언급입니다.
1.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2.너희는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3.너희는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 주었고,
4.너희는 내가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5.너희는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6.너희는 내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전부 6개 항목의 실천적 동사의 사랑입니다. 과연 몇개 항목에 걸쳐 실천된 사랑인지 우리의 사랑을 비춰주는 거울같습니다. 바로 성 마르티노가 걸인에게 실천한 사랑은 4째 항목에, 베네딕도 성인이 당신 수도자들에게 강조하는 환대의 사랑은 3째 항목에 관련됨을 봅니다. 이어지는 의인들의 “저희가 언제 주님께 그렇게 해드렸냐?” 물음에 대한 주님의 답변이 충격입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이며 길이 마음에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국적이나 인종, 종교에 관계 없이, 가장 작은 이들 하나하나 모두를 당신 형제들이라 하며 이들에 대한 사랑 실천이 바로 당신께 한 사랑이라며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참 놀랍고 놀라운 말씀입니다. 그가 누구든 곤경이나 궁핍중에 있는 보잘 것 없는 자들 모두가 당신의 형제이고 당신의 현존이며 구원의 도구라는 것입니다.
하늘 높은 곳에서도, 멀리 밖에서도 아닌 바로 가까이에서 가난하고 약하고 소외받고 버림받고 외로운 가련하고 불쌍한 존재들 모두가 주님의 형제들이며 주님의 현존임을 깨달으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게 진정한 회개입니다. 우리는 무지에 눈이 가려 곤경중에 있는 주님을 모르고 지나친 일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하느님은 사랑입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에처럼 하느님의 사랑은 하느님의 종이자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통해 그대로 실현됨을 봅니다. 그대로 예수님의 고백처럼 들립니다.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1.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2.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 주며,
3.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4.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5.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하고,
6.슬퍼하는 이들에게 재대신 화관을,
7.슬픔대신 기쁨의 기름을,
8.맥 풀린 넋대신 축제의 옷을 주게 하셨다.”
참으로 이런 사랑의 주님을 만날 때, 비로소 참 자유인의 삶에 받은 사랑을 실천하며 살 수 있겠습니다. 주님은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새롭게 만나 주시고, 당신 사랑으로 우리를 온갖 질곡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시며 자유롭게 하시어 당신 사랑의 도구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오늘 화답송 후렴은, 사제서품식 미사 때 화답송 후렴과 같으며 제가 참 좋아하는 시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시편89,2ㄱ).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