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삶의 영원한 모범이신 성모 마리아 -성모 마리아 예찬禮讚-2022.12.20.화요일 12월20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Dec 20,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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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20.화요일 12월20일                                                                    이사7,10-14 루카1,26-38

 

 

 

우리 삶의 영원한 모범이신 성모 마리아

-성모 마리아 예찬禮讚-

 

 

 

오늘 12월20일은 대림2부 넷째 날입니다. 날마다의 M후렴이 참 아름답고 주님 오심에 대한 좋은 준비가 됩니다. 오늘 M후렴은 “오! 다윗의 열쇠여(O Clavis David)”로 시작됩니다. 바로 오늘 복음 알렐루야 환호송과 일치합니다.

 

“오 다윗의 열쇠여, 이스라엘 집안의 홀이시여, 주께서 여시면 아무도 닫지 못하고, 닫으시면 아무도 열지 못하오니, 오시어 죽음의 땅과 어둠속에 앉아있는 우리를 결박에서 풀어 주소서.”

 

노래할 때는 모르겠는데 이렇게 공부하는 마음으로 써보니 참 깊고 은혜롭습니다. 강론 쓰는 시간은 공부하는 시간, 회개하는 시간,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대림 제1주일부터 2월1일까지 끝기도후 라틴어로 부르는 성모 찬송가 역시 내용이 참 은혜롭습니다.

 

“구세주의 존귀하신 어머니,

영원으로 트인 하늘의 문, 바다의 별이시여,

넘어지는 백성 도와 일으켜 세우소서.

당신의 창조자 주님 낳으시니, 온 누리 놀라나이다.

가브리엘의 인사받으신 그 후도 전과 같이 동정이신 이여.

죄인을 여여삐 여기소서.”

 

오늘 복음의 배치도 절묘합니다. 월요일 대림 제4주일 주인공은 성 요셉이었고, 어제 월요일은 세례자 요한의 출생 예고, 그리고 오늘은 예수님의 탄생이 예고되며 주인공은 마리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의 순종으로 아기 예수가 잉태된 사실은 인류 역사의 결정적 전환점이 됩니다.

 

하느님이 우리 세계에 들어오시기로 선택하신 장소는 로마도 아테네도 알렉산드리아도 즉 당시 세계의 권력, 문화, 학문의 중심지도 아닌 이름도 미미한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 나자렛입니다. 하느님의 한없는 겸손과 자기비움에 감격하게 됩니다. 

 

시골 동네 처녀 마리아를 당신의 도구로 삼으실줄을 세상 그 누가 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새삼 깊이 묵상할 성탄의 신비중 하나입니다. 주님의 천사인 가브리엘은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 마리아를 만나자 마자 축복의 인사를 바칩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바로 이 말씀은 제가 고백성사 보속으로 드리는 ‘말씀 처방전’에 가장 많이 인용되는 구절입니다. 이 말씀을 받아본 어느 수녀의 감동에 벅찬 환성歡聲도 잊지 못합니다.

 

“아, 신부님, 보속補贖이 아니라 보석寶石입니다. 살아 있는 보석같은 말씀입니다.”

 

도대체 성모 마리아의 위대한 점은 어디 있을까요? 어떻게 우리도 은총 가득한 존재로 살 수 있을까요? 사실 깊이 들여다 보면 위 말씀은 우리 각자에게도 해당됨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 또한 주님의 축복 받은 존귀한 존재로 존엄한 품위를 유지하며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을까요? 성모 마리아의 삶의 모습이 예수님의 양부 성 요셉과 흡사합니다.

 

첫째, 정주의 삶입니다.

안주가 아닌 늘 새롭게 시작하는 정주입니다. 밖으로는 님기다리는 산같은 정주에, 내적으로는 끊임없이 하느님 향해 흐르는 맑은 강같은 내적여정의 삶입니다. 안주로 녹슨 삶이 아니라 늘 정주 수행으로 반짝이는 영혼이요, 웅덩이에 고인 썩은 물이 아니라 늘 맑게 흐르는 삶입니다. 

 

바로 나자렛 고을에서 마리아는 참된 정주의 삶중에 끊임없이 깨어 하느님을 찾으며 주어진 책임을 다하며 삶의 중심인 하느님께 깊이 믿음의 뿌리를 내렸음이 분명합니다. 눈밝은 하느님이 이를 놓칠이 없습니다. 그러니 누가 알아주지 않는다 탓할 것이 아니라 부단히 정주의 삶에 충실한지 자성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은 당신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이런 마리아를 찾아 얼마나 축복받은 존재인지 확인시킵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둘째, 경청의 삶입니다.

마리아는 분명 침묵과 고독을 사랑했던 영혼이었을 것입니다. 침묵과 고독에 대한 사랑은 하느님만을 찾는 수도승들의 생래적 영적 본능에 속합니다. 고립단절의 침묵과 고독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과 연대해 있는 사랑의 침묵, 사랑의 고독입니다. 

 

얼마나 경청하는 관상가의 모습인지 특히 천사의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곰곰이 생각하는 마리아의 모습에서 관상가의 진면목이 일정한 경지에 이른 렉시오 디비나의 수준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요셉처럼, 마리아를 얼마나 신뢰하는지 천사를 통해 하느님은 자기 속내를 다 드러냅니다. 도대체 마리아에게는 비밀이 없는 듯 투명하게 다 밝힙니다. 말그대로 하느님의 모험입니다.

 

“보라, 이제 네가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릴 것이다.”

 

이어지는 내용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선물이기 보다는 참 버거운 짐같은 느낌입니다만 이어지는 말씀들을 마리아는 충분히 경청합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경청이요 ‘경청 훈련’ 또한 참으로 필요함을 깨닫습니다.

 

셋째, 순종의 삶입니다.

마리아는 충분히 경청한 후 제가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물어봅니다. 결코 허술하지 않고 아주 야무진 마리아의 일면을 봅니다. 결코 맹목적인 순종이 아니라 주눅들지 않고 참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사랑과 신뢰를 가득 담아 진심으로 묻습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 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주님의 천사의 자상한 설명을 통해 마리아에게 지극 정성으로 배려하는 하느님의 친절이, 하느님의 겸손이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필시 천사를 통한 하느님의 진실과 겸손에 감동한 마리아의 즉각적 순종임이 분명합니다. 그대로 전폭적 신뢰와 사랑을 담아 고백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아 이 말씀이, 마리아의 응답이 인류 역사의 결정적 전환점이 됩니다. 마리아의 순종의 응답으로 비로소 하느님은 세상에 들어오셔서 차질없이 구원역사를 펼칠 수 있게 됩니다. 바로 마리아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온세상이 깊은 침묵중이었다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주석도 생각납니다. 정말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조마조마한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순종이 하느님께는 얼마나 고마웠겠는지요! 아마도 하느님께서도 성모님을 통한 우리의 전구를 거절하지 못할 것입니다.

 

마침내 마리아의 순종으로 이사야의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예언도 실현됩니다. 이를 가톨릭 교회는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밝힙니다.

 

“신앙의 눈으로 계시 전체와 연관시켜 보면, 하느님께서 당신 구원 계획에서 당신 아들을 동정녀에게서 태어나게 하고자 하셨던 신비한 이유들을 발견할 수 있다”.(가톨릭 교리서502). 

 

“마리아의 동정성은 강생에서 취하신 하느님의 절대적 주도권을 나타낸다. 예수님의 아버지는 오로지 하느님뿐이시다. 그분께서 취하신 인간 본성 때문에 성부에게서 멀어지시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그 인성으로는 어머니의 아들이시다. 그러나 이러한 두 본성 안에서 그분은 바로 성부의 아들이시다.”(가톨릭 교리서503).

 

성모 마리아는 우리 삶의 영원한 모범입니다. 정주의 삶, 경청의 삶, 순종의 삶을 통해 날로 성모님을,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도록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의 자비를 청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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