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19.연중 제28주간 목요일 로마3,21-30ㄱ 루카10,1-9
행복하여라
-예수님만이 참행복이시다-
오늘 루카복음은 여섯의 불행선언중 마지막 두 개입니다. “불행하여라”를 읽는 순간, “회개하여라”로 들렸습니다. 예수님은 주로 원하셨고 하신 것은 불행선언이 아니라 “행복하여라”로 시작되는 행복선언입니다. 마태복음의 산상설교는 진복팔단으로 시작됩니다.
행복이냐 불행이냐? 행복도 불행도 선택임을 깨닫습니다. 누구나 원하는바 행복이요 불행을 택할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시하는바 참행복은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 있는 선택입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바 선택-훈련-습관의 영적 도식입니다.
“무기들이 침묵하게 하소서. 가자 지역에서의 상황이 절망적입니다.”
새벽 교황님 홈페이지에서 읽은 대문자 말마디가 절박한 상황임을 알리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끊임없이 계속되는 전쟁이요 불행한, 참혹한 현실입니다. 예루살렘 성지의 평화를 위해 10월27일 모든 신자들에게 기도와 단식을 호소한 교황님입니다. 참으로 인간 무지로 인한 전쟁이요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은 하느님께 돌아가는 회개뿐임을 깨닫습니다.
마태복음의 참행복이란 주제하에 전개되는 진복팔단의 내용들은 늘 들어도 정신이 새로워집니다. 가짜 행복이 아닌 진짜 행복이라 하여 참행복입니다. 종파를 초월하여 모든 영성가들이 공통적으로 공감하는 내용입니다. 오늘 복음의 “불행하여라”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참행복을 나눕니다. 정말 오늘날 전쟁과 폭력의 시대에 목마르게 와닿는 이런 참행복입니다.
1.“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2.“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3.“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4.“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5.“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6.“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7.“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8.“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참행복 선언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는 결론같은 말씀도 참 고무적입니다. 아니 하늘에서 상을 받기 전,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된 참행복입니다. 바로 참행복의 근원은 하느님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어제 읽은 두 말마디와 황옥연의 “사랑”이란 시도 마음에 와 닿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의미 없이 보낸 날은 웃지 않고 보낸 날이다.”-
-“고마움을 모르는 자의 희망은 겨울의 서리처럼 녹아버리고, 허비된 물과 같이 흘러가 버릴 것이다.”-
-“바닷가에 서면
조가비만한 나
치악산에 가면
여치만큼 작은 나
그런데 하느님은
나를 산보다 바다보다
더 크대요
더 크대요”-
하느님 사랑은 이처럼 감동적입니다. 교황님의 사도적 열정이란 주제로 나눈 어제 수요일(10,18) 주중 알현시간 강의는 사하라 사막의 성자 샤를로 후꼬의 일화입니다. 성인은 모든 이들에게 '온유함의 사도'로 보편적 형제가 되기를 갈망하면서 하루중 12시간을 감실앞에 머물러 기도했다 합니다. “예수님께서 침묵중에 활동케 하시도록 하라”란 주제로, ‘침묵중에 복음 선포’, ‘온유함의 사도직’ ‘애덕의 기쁨’이란 내용으로 성인의 삶을 압축했습니다. 마지막 결론 말씀이 깊은 울림을 줬습니다.
“미소로, 그분의 단순함으로 샤를로 형제는 복음을 증거했다. 결코 개종이 아니다. 결코 개종이 아니라 증거다. 복음화는 결코 개종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증거(witness)를 통해, 매력(attraction)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다.”
참사랑의 참행복만이 복음화로 이끈다는 것입니다. 사랑밖에 답이, 길이 없습니다.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도 회개와 사랑뿐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깊이 젖어 살았던 성 샤를로 후꼬 성인의 영성이 그리워지는 참 시끄럽고 혼란한 세상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지탄이 대상이 된 바리사이들과 율법교사들 무식한 사람이 아니라 선택된 엘리트 집단이요 유식한 집단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무식(無識)하지 않았으나 무지(無智)했습니다. 참된 회개가 사랑과 지혜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공부많이 해도 하느님 사랑 공부 안하면 무지의 사람들일뿐입니다. 진정 하느님으로부터 떠난 자들입니다.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
무덤을 만들고 기념하면서 역설적으로 현재까지 여전히 예수님과 제자들에 대해 악행을 반복하는, 폭력의 악순환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질책입니다. 작금의 우리의 현실에서도 여실히 증명됩니다.
“아벨의 피부터,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그 책임을 저야할 것이다.”
인류사는 전쟁사이자 폭력과 보복의 역사입니다. 폭력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오늘 이 세대에게 주는, 참으로 전격적 회개를 촉구하는 예수님의 예언자적인 말씀입니다. 여기서 단호히 단(斷)!, 끊어버려야 할 무지의 악과 죄입니다. 바리사이들에 이어지는 율법학자들에 대한 질책이자 하느님을 잊은 오만한 오늘의 식자들을 향한 질책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너무 왜곡 부패 변질된 무지의 사람들입니다. 회개도 때가 있는 법, 너무 부패 변질되기전 회개해야 함을 배웁니다. 무지의 어리석음이 병이요 죄이며 악입니다. 이들의 행태가 점입가경 구제불능입니다. 마치 발악(發惡)하는 악마같습니다. 하느님을 떠났을 때, 이성을 잃었을 때, 상식과 양식을, 공정과 정의를 잃었을 때, 얼마나 사람이 악해질수 있는지, 잔인할 수 있는지, 망가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생생한 실례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흡사 악의 연대처럼 느껴집니다. 회개는커녕 독한 앙심을 품고 많은 질문으로 예수님을 몰아대며 그분을 옭아매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이런 면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겪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이 모두는 우리의 반면교사가 됩니다. 더욱 회개를 통한 참나를, 참행복을 살아야 하겠다는 자각을 하게 됩니다. 바로 이에 대해 바오로 사도가 제1독서에서 답을 줍니다.
회개와 더불어 겸손과 믿음입니다. 회개와 함께 가는 믿음입니다. 회개의 여정은 믿음의 여정이 됩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나 믿음의 빛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절망, 원망, 실망의 삼망의 사람들이 아니라, 반대로 감사, 감동, 감탄의 삼감의 사람들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도 믿음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느님의 의로움은 믿는 모든 이들을 위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져 의롭게 됩니다.”
내 중심의 삶에서 예수님 중심의 삶으로의 부단한 전환이 회개입니다.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은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하느님의 영광을 회복합니다.
참행복에 대한 궁극의 답도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행복도 불행도 선택입니다. 천국도 지옥도 선택입니다.
무지의 어둔 사람이 불행을, 지옥을 선택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참행복이자 천국이신 예수님을 선택합니다.
신망애의 주님, 진선미의 주님입니다.
이래서 회개의 여정은 믿음의 여정이요 동시에 예닮의 여정임을 부단히 강조합니다.
참으로 주님은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주님을 선택하여 참삶을, 참행복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