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23.연중 제29주간 월요일 로마4,20-25 루카12,13-
탐욕에 대한 처방법
“탐욕”의 뿌리에는 “두려움”이, 두려움의 뿌리에는 “불신”이 있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사랑과 믿음의 삶을 삽시다-
그동안 참 많이도 강조했던 무지입니다. 마음의 병중 무지가 으뜸입니다. 무지에서 기인하는 탐욕, 분노, 어리석음, 질투, 폭력, 전쟁등 끝이 없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쟁도 거의 대부분 결국은 무지의 탐욕에서 기인합니다. 무지의 악, 무지의 병, 무지의 죄입니다. 모든 불행의 근원이 무지입니다. 무지중 대표적인 것이 탐욕입니다.
탐욕의 무지, 탐욕의 어리석음입니다. 끝없는 탐욕입니다. 탐욕에 눈멀면 누구나 어리석은 사람이 됩니다. 무지의 인간, 인간의 정의같습니다. 참으로 대안이 없는 무지같습니다. 탐욕의 인간에 때로 절망할 때도 있는데 하느님 마음도 그러할 것입니다. 작금의 기후재난도 순전히 인간의 탐욕에 기인합니다. 예수님의 충고가 참 엄중합니다.
“모든 탐욕을 주의하고 조심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있지 않다.”
200주년 공동번역은 더 실감이 납니다. “사실 제 아무리 부요하더라도 사람이 자기 소유로 자기 생명을 보장 받지는 못한다.” 그렇습니다. 세상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우리 생명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바로 그 소유로, 재산으로 자기 생명을 보장 받으려한 오늘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입니다.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둔후 어리석은 부자의 독백을 들어보세요.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그리고 자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바로 오늘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는 일부 현상이 아닌 보편적 무지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예나 이제나 변함없는 무지의 탐욕스런 인간입니다. 탐욕이 그를 눈멀어 어리석게 한 것입니다. 그에게는 땅의 현실만 있었지 위로의 하늘은 없었습니다. 땅에 보물을 쌓을 줄만 알았지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일을 까맣게 몰랐습니다.
하늘의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찬미도 없었고 이웃과의 나눔도 없었습니다. 위로 하느님과의 관계도, 옆으로 이웃과의 관계도 완전히 차단된 고립무원, 고립단절의 지옥같은 자기 감옥의 수인이 된 어리석은 부자입니다. 참으로 전격적 회개의 은총이 절박한 어리석은 부자입니다. 자기 중심에서 하느님 중심으로의 전환이 회개입니다.
탐욕에 대한 궁극의 답은 하느님 믿음뿐입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자선과 선행의 나눔뿐입니다. 이런 사랑의 실천 또한 하느님 믿음의 표현입니다. 제가 이래서 평소 강조하는 하느님 믿음입니다. 노년의 품위유지를 위한 우선순위는 “1.하느님 믿음, 2.건강, 3.돈”이라 극구 강조합니다. 노골적으로 “물보다 진한게 피이고 피보다 진한게 돈이고 돈보다 진한게 하느님 믿음이다.”라는 말도 합니다.
돈앞에서는 속절없이 무너지는 인간관계들입니다. 하느님 믿음 없이는 세상 그 무엇도 탐욕을 제어하지 못합니다. 궁극의 탐욕의 제동장치가 하느님 믿음입니다. 그러니 자녀들에게 물려줄 최고의 유산은 하느님 믿음이라고 많이 강조합니다. 이어지는 부자의 독백에 대한 하느님의 말씀이 오늘의 탐욕의 인간들에게, 부자들에게 주는 전격적 회개의 촉구 말씀처럼 들립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
아, 이게 어리석은 부자에게 주신 최후의 경고 같은 한밤중 꿈이었다면, 아마 부자는 잠깨는 즉시 전격적 회개로 하느님을 찾고 이웃과의 나눔 생활로 방향을 바꿨을 것이라는 유쾌한 상상도 해봅니다. 이어지는 말씀 역시 우리 모두에게 주는 결론같은 말씀입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이러하다.”
정말 진짜 부자는, 자유롭고 행복한 부자는, 자신을 위해 재화를 모으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자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은 땅에 보물을 쌓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보물을 쌓는 부단히 자선과 나눔의 선행을 실천하는 자비로운 믿음의 사람입니다.
참으로 탐욕의 정체를 통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탐욕의 뿌리에는 두려움과 불안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한치 앞도 내다볼수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 주위 환경에서 오는 예측 못할 생명과 안위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 이 끝없는 두려움과 불안에서 기인하는 자연적인 방어본능이, 보호본능이 탐욕으로 작동된 것입니다.
그러나 탐욕이, 그 많은 재물이 생명을 보장하지 못함은 너무나 자명한 현실입니다. 그러니 궁극의 원인인 불신에서 기인하는 두려움과 불안, 그리고 탐욕의 순서입니다. 탐욕의 가장 깊은 뿌리는 불신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믿음이 탐욕에 대한 궁극의 해답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믿음의 빛 앞에서 자취없이 사라지는 두려움과 불안의 어둠이요 이어 탐욕의 악이자 환상도 저절로 정체가 폭로되어 힘을 잃게 됩니다.
이런 하느님 믿음의 뿌리를 깨달은 이들은 이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일에 전념합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재미로, 기쁨으로, 맛으로 살아갑니다. 세상맛, 돈맛, 밥맛이 아닌 하느님 맛, 기도 맛, 말씀 맛, 사랑 맛으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 맛으로 살아갑니다. 이런 이들이 진짜 자유롭고 행복한 부자들입니다. 정말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이란 고백이 절로 나옵니다. 사랑만 있으면 욕심만 비워 마음의 눈만 열리면 하늘에 보물을 쌓을 수 있는 일은 곳곳에 널려 있습니다. 바로 그 전형적 인물이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선망하는 하느님 믿음의 영웅,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불신으로 하느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믿음으로 더욱 굳세어져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실 수 있다고 확신하였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탐욕에 뿌리에는 두려움과 불안이, 두려움과 불안의 뿌리에는 불신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탐욕의 궁극의 처방은 하느님 믿음뿐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의 빛나는 영원한 모범이 아브라함입니다. 바로 이는 우리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 주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을 믿는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그렇게 인정을 받을 것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탐욕에 대한 최고의 처방입니다. 참으로 하느님 믿음과 파스카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날로 튼튼하게 해 주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요, 하늘에 보물을 쌓아가는 믿음의 여정과 더불어 날로 힘을 잃어가는 무지의 탐욕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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