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여정 -회개, 만남, 버림, 따름-2020.8.17.연중 제20주간 월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Aug 1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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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8.17.연중 제20주간 월요일                                                               에제24,15-24 마태19,16-22

 

 

 

구원의 여정

-회개, 만남, 버림, 따름-

 

 

 

요즘 저에겐 새로운 습관이 하나 생겼습니다. 아침 식사후, 점심 식사후 산책때 잠시 시냇가를 걷는 것입니다. ‘시냇물’ 동요를 부르며 시냇가를 걷다보면 늘 거기 그 자리에 물오리들을 보게 되고 사진도 찍습니다. 그러나 목적은 물오리가 아니라 오랜만에 맑게 흐르는 시냇물을 보는 즐거움 때문입니다. 시냇물이 마르고 물오리가 사라지면 그때는 시냇가의 산책도 끝날 것입니다.

 

흘러야 삽니다. 맑게 흐르는 시냇물은 그대로 구원의 여정을 상징합니다. 끊임없이 주님과 함께, 주님을 향해 흐르는 구원의 여정입니다. 이런 주님의 방향을 잊고 정체되어 웅덩이에 고인 물이 될 때 썩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분도 수도자의 삶은 밖으로는 정주의 산같은, 안으로는 끊임없이 하느님 향해 맑게 흐르는 강같은 내적여정의 삶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여 우리는 밖으로는 정주의 산처럼 그 자리에 머무르지만 내적으로는 구체적 일과표라는 회개의 시스템에 따라 계속 맑게 흐르는 강처럼 삽니다. 바로 이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제 자작 좌우명 애송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중 셋째 연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끊임없이 하느님 바다 향해 맑게 흐르는 강(江)이 되어 살았습니다. 

때로는 좁은 폭으로 또 넓은 폭으로

때로는 완만(緩慢)하게 또 격류(激流)로 흐르기도 하면서

결코 끊어지지 않고 계속 흐르는 '하느님 사랑의 강(江)'이 되어 살았습니다.”-

 

그대로 주님과 함께, 주님을 향한 구원의 여정을 상징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어떤 부자는 이점에서 문제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어떤 젊은 부자는 참 좋은 사람이요 좋은 신자임이 분명합니다. 참으로 인간의 본능적 영적 갈망을 대변하는 구도자의 모범입니다.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사막의 스승을 찾았던 사막 수도자들은 물론 우리의  궁극적 물음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접근법이 지혜롭습니다. 저는 여기서 웃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실현이자 하늘 나라의 구원이신 주님을 앞에 두고 이런 질문을 한 젊은이 때문입니다. ‘나무들’이란 구체적 수행들만 봤지 ‘숲의 주님’을 보지 못한 부자입니다. 수행엔 충실했는데 삶의 방향이자 삶의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을 까맣게 잊은 어떤 젊은 부자입니다. 

 

무엇을 해야 구원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야 구원인데 주님을 만나지 못한 수행이니 영원히 목마를 수 뿐이 없습니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을 봐야 하는데 계속 손가락의  수행에만 몰두하는 참 좁은 시야의 젊은 부자입니다. 이웃관계의 금령의 계명도 다 지켰고 부모 공경과 이웃사랑도 다 했는데 영적 갈증과 삶의 허기는 여전합니다. 이에 비하면 매일 미사를 봉헌하며 영원한 생명의 주님을 만나 모심으로 영적 갈증과 허기를 해결하는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지요. 끊임없이 맑게 흐르는 구원의 여정에 빛나는 이정표가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 매일 미사입니다. 

 

무엇을 행하여 구원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고 따라야 구원입니다. 말그대로 주님과 만남의 은총의 선물이 구원입니다. 아무리 수행에 충실해도 삶의 방향, 삶의 목적, 삶의 중심, 삶의 의미이신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영적 갈증과 허기의 해결은 요원합니다. 젊은 부자의 말이 내면의 답답함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바로 여기에 오늘 복음의 핵심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삶은 구원의 여정이자 주님과 만남의 여정임을 까맣게 몰랐던 부자입니다.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감으로 날로 주님과 깊어지는 관계의 여정에 전혀 문외한이었던 젊은 부자입니다. 이에 대해 주님은 궁극의 처방을 제시합니다. 바로 다음 복음 말씀은 사막 은수자의 아버지 안토니오를 회심시킨 말씀이기도 합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소유의 삶에서 존재로의 삶의 전환을, 바로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가진 것을 가난한 자들과 나누고 “나를 따라라” 말씀대로 당신을 따라, 맑게 흐르는 강으로 살라는 구원에의 초대입니다. 그러니 구원의 여정은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주님을 따라 맑게 흐르는 구원의 여정,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주님과 날로 깊어가는 우정의 관계만이 근원적 영적 갈증과 허기를 채워줄 수 있습니다. 바로 참행복의 완전한 삶도 바로 여기 있습니다. 참으로 살아있음의 표지가 주님을 따르는 일이요 날로 깊어지는 주님과 우정의 관계입니다. 젊은 부자의 반응은 바로 탐욕에 소유된 인간의 보편적 반응일 것입니다.

 

“그러나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후 젊은이의 삶은 독자들의 상상에 맡기는 복음 사가입니다. 아마 젊은이에 대한 주님의 정확한 진단은 이 부자에게 평생 화두가 됐을 것이며 혹시 주님의 제자가 되지는 못했어도 그의 삶에는 결정적 전환의 계기가 되었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제가 참 많이 사용하는 말마디가 삶의 '여정'입니다. 모든 것이 지나가는 여정입니다. 그냥 막연한 되는 대로의 여정이 아니라 끊임없는 회개와 주님과의 만남, 그리고 버림과 추종의 여정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에제키엘서는 에제키엘 아내의 죽음을 상징으로 삼아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화답송 시편도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너희는 너희를 낳으신 하느님을 저버리고, 너희를 세상에 내신 하느님을 잊어버렸다.”

 

주님을 잊을 때 '무지의 늪'에서 표류하고 방황하는 인생이 되기 십중팔구입니다. 참으로 끝까지 기억해야할 주님이시며 날로 깊어져야 할 주님과 사랑의 관계입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물론 모든 성인들과 신심깊은 형제들 모두가 우리에겐 회개의 생생한 표징이자 상징이 됩니다. 다시 주님께 돌아와 주님과 함께 주님을 따라 새롭게 구원의 여정에 오르라는 회개에의 초대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입니다. 어제 받은 도반 사제의 메시지입니다.

 

“신부님, 오늘 밤부터 내일까지 수도원 주유소에 기름을 넣으려 가려고 합니다. 내일 고해성사를 주실 수 있으신가요?”

 

주님과 구원의 여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주는 평생 성사가 매일의 이 거룩한 성체성사요 주기적으로 바치는 고백성사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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