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사랑과 지혜의 신비 -기도와 회개, 경청과 환대-2020.10.2.연중 제26주간 금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Oct 0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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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연중 제26주간 금요일                                                  욥38,1.12-21;40,3-5 루카10,13-16

 

 

 

하느님 사랑과 지혜의 신비

-기도와 회개, 경청과 환대-

 

 

 

“대천사 축일에 천사들을 통해 하느님이 살려 주셨구나!”

“형제들의 기도를 통해, 하느님이 살려 주셨구나!”

 

어제 전화 통화로 사고 당시 택시 운전사로부터 상세히 사고 경위를 설명 듣고 저절로 흘러나온 고백이었습니다. 고속도로에서의 이런 사고라면 십중팔구 중상重傷아니면 즉사卽死라는 것입니다. 택시 운전사도 ‘기적’이라 누차 강조했습니다. 하느님은 사고후 즉시 ‘내일 미사와 내일 강론 걱정’을 한 저를 살려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감옥에서 기적적으로 풀려난 후 고백도 생각났고 일부 제 경우에 맞게 바꿔봅니다.

 

“이제야 참으로 알았다. 주님께서 당신의 천사를 보내시어 죽음의 위험에서 나를 빼내어 주셨다.”(사도12,11)

 

당시 저는 이런 급박한 상황중에도 차내에서 참으로 이상하리만큼 마음도 몸도 참 평온, 편안했고 머리 상처도 뒤 늦게 발견했기에 전혀 깨닫지 못했다가 어제 통화후 비로소 처음 크게 놀라 몸과 마음이 떨렸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수도형제는 “천사가 품에 꼭 안아 주신 것입니다.” 라 말했는데 그때의 심경에 꼭 맞는 말입니다. 걱정하는 분께 보낸 가톡 메시지입니다.

 

“하느님 기적 은총으로 살아났고 기적처럼 상처도 경미하고 기적처럼 후유증도 없으니 감사할뿐입니다.”

 

하여 처음에는 머리 상처부분의 커다란 흰 반창고가 ‘깨어있음의, 회개의 표지’처럼 생각됐는데 어제부터는 하느님 살려 주신 ‘감사의 표지’처럼 너무 소중하게 여겨졌습니다. 하느님 사랑의 신비에 대해 새삼 깊이 공부하고 배우고 깨닫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여 오늘 욥기 말씀도 화답송 시편 말씀도 참으로 실감있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삶은 기적奇蹟이요 모두가 은총恩寵이지만 동시에 모두가 신비神祕입니다. 정말 신비를 깨달아 알수록 침묵할 수뿐이, 겸손할 수뿐이, 기도할 수뿐이 없습니다. 설명할 수 없는 불가사의의 신비로운 일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아무리 안다해도 알 수 없는 신비의 영역은 끝이 없고 우리가 알 수 있는 부분은 극히 미미한 수준일 것입니다. 알면 알수록 신비로 가득찬 모르는 세상일 뿐입니다. 하여 주님의 반격과 추궁에 욥의 침묵은 너무 당연했습니다.

 

“저는 보잘 것 없는 몸, 당신께 무어라 대답하겠습니까? 손을 제 입에 갖다 댈 뿐입니다. 한 번 말씀드렸으니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두 번 말씀드렸으니 덧붙이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욥에게는 완전히 알려지지 않았던 환경과 참으로 많은 것들이 세상에 널려 있음을 압니다. 이렇게 발명의 세기, 첨단 문명의 시대에 발견한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삶은 여전히 대부분 신비로 남겨져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지혜안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또 진행되는 많은 일들을 도저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런 와중에 평화를 주는 우리의 유일한 응답은 하느님 신뢰의 끈을 꼭 잡는 것입니다. 진리의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 연민의 하느님, 정의의 하느님을 말입니다. 비록 무질서와 혼돈, 폭력의 세상에도 불구하고 우리 세상은 ‘진리Truth’와 ‘사랑Love’과 ‘아름다움Beauty’으로 관통되어 있습니다. 홉킨스 시인의 고백도 위로가 됩니다. “세상은 하느님의 위대함으로 가득하다. 세상 저변의 것들에는 늘 가장 깊은 새로움이 살아있다.” 

 

욥은 이런 깊은 깨달음을 통해 신비가가 되어 갑니다. 오늘 화답송 시편의 시인 역시 신비가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지혜로운 신비를 깨달아 알아 갈수록 터져 나오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기도입니다. 화답송 시편 139장은 매 4주간 수요일 저녁기도시 노래할 때 마다 늘 공감하며 감동하는 시편이기도 합니다.

 

“주님 당신은 저를 살펴보시고 잘 아시나이다. 앉으나 서나 당신은 저를 아시고, 멀리서도 제 생각을 알아차리시나이다. 길을 가도 누워 있어도 헤아리시니, 당신은 저의 길 모두 아시나이다.”(시편139,1-4)

 

시편 일부만 소개했지만 139장 1-24절 까지 전장이 하느님의 신비로운 사랑과 지혜로 가득한 내용들입니다. 시간되면 꼭 찾아 읽어 보며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교통사고후 위 화답송 시편은 더욱 깊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신비가로 말하면 예수님이야 말로 하느님 마음에 정통한 대 신비가입니다. 신비가 예수님의 오늘 복음에서의 구체적 처방은 회개입니다. 하느님의 신비로운 사랑과 지혜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기도와 회개뿐입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 쓰고 회개했을 것이다. 너 가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 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결국 삶의 기적은 회개의 표징이자 동시에 감사의 표징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 회개하지 않는 고을을 향한 예언자적 탄식이 가슴을 칩니다. 이것은 저주가 아니라 탄식이며 마지막 호소입니다. 그대로 오늘 현대인들에게 주는 회개의 호소일 수 있습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가 우리 영성생활에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하느님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십니다. 삶에 하느님 섭리가 개입되지 않은 우연은 결코 없기 때문입니다.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느님의 뜻은 아닐지라도 하느님의 허락없이 이뤄지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 후반부도 의미심장합니다. 당대의 제자들뿐 아니라 오늘의 주님을 믿는 자들 하나하나가 예수님은 물론 하느님께로 연결되어 있음을 봅니다. 잘 경청하고 환대해야 할 이웃 형제들입니다.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이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형제들에 대한 경청과 환대는 바로 주님께 대한 경청과 환대에 직결됨을 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신비로운 사랑과 지혜에 대한 우리의 당연한 응답은 기도와 회개, 경청과 환대임을 깨닫습니다. 

 

삶은 기적이자 은총이자 신비입니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기도와 회개, 경청과 환대가 일상화日常化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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