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과 깨달음의 여정 -날로 확장되는 자비의 지평-2021.8.18.연중 제20주간 수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Aug 18,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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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8.18.연중 제20주간 수요일                                                                 판관9,6-15 마태20,1-16

 

 

 

배움과 깨달음의 여정

-날로 확장되는 자비의 지평-

 

 

 

“주님 찬양하라 내 영혼아, 내 안의 온갖 것도, 그 이름 찬양하라.

내 영혼아 주님 찬양하라, 내 안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시편103,1-2)

 

주님 찬양의 기쁨으로, 힘으로 살아가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특히 제 좋아하는 순수한 우리말 단어는 배움, 깨달음, 배움터, 쉼터, 샘터등입니다. 이 밖에도 순수한 정감이 넘치는 순수한 우리말들도 무수합니다. 아주 예전 마산 트라피스트 수도원을 찾았을 때 수도원 정문에 걸려있던 ‘주님을 섬기기 위한 배움터’란 말마디 문패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평생 주님을 섬기는 법을 배우는 배움터가 베네딕도회 수도공동체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갈망과 배움에 대한 사랑을 지닌 이들이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입니다. 배움에 대한 사랑은 이미 호학好學이라 하여 공자님도 강조한 바 있습니다. 평생 배움의 여정중에 있는 죽어야 졸업인 평생 배움터의 학교에서 공부하는 평생학인이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평생전사에 주님의 평생학인인 영예로운 신분의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입니다. 그래서 수도자의 유행을 타지 않는 검정 수도복은 평생전투복이자 평생학생복이기도 합니다. 비단 베네딕도회 수도자들뿐 아니라 주님을 믿는 모든 형제자매들 역시 주님의 평생전사요 평생학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제 고대 수도승 삶에 있어서 영적 수행의 네 필수적 요소가 새삼스럽게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살기를 배우기(Learning to Live)’, ‘대화를 배우기(Learning to Dialogue), ’죽음을 배우기(Learning to Die)’, ‘읽는 법을 배우기(Learning how to Read)’ 였습니다. 어찌 넷 뿐이겠는지요! 사랑, 기도, 순종, 청빈, 정결, 침묵, 경청, 겸손, 섬김등 배워야 할 덕목은 끝이 없습니다. 선선한 가을은 기도의 계절이자 독서의 계절이라 합니다. 하느님이 한층 가까이 느끼는 계절입니다. 마침 어제 써놓은 ‘간원懇願’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하느님 아버지 보고 싶으면

눈들어 높고 넓고 깊은 하늘을 바라본다

하느님 어머니 그리우면

수도원 자연 숲 품속을 거닌다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을 숨쉬며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나

날로 하느님을 닮았으면 좋겠다”-

 

마지막 한가지 간절한 바램은 주님의 배움터, 쉼터, 샘터인 산같은 정주의 수도원에서 살아 있는 그날까지 매일 ‘미사’를 드리고, ‘강론’을 쓰고, 걸었으면 하는 셋뿐입니다. 배움과 깨달음은 함께 갑니다. 깨달음의 지혜로 전환되지 않는 축적된 배움이라면 쓰레기 짐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니 배움의 여정은 그대로 깨달음의 여정이 됩니다. 깨달음의 은총입니다. 성령의 은총있어 배움은 깨달음으로 전환됩니다. 무지의 마음 병에 대한 근본치유도 이런 배움과 깨달음의 여정에 항구하는 것 하나뿐입니다. 깨달음을 통해 날로 주님을 닮아가며 날로 자유로워지고 자비로워지고 지혜로워지고 겸손해지고 온유해지는 멋지고 아름다운 참 삶의 실현입니다. 날로 확장되는 자비의 지평안에서 하느님의 자비와 정의가 서로 만납니다. 

 

그대로 “배움과 깨달음의 여정-날로 확장되는 자비의 지평-”은 오늘 강론 제목이기도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공부하는 마음으로 배우는 마음으로 오늘 말씀에 접근합니다. 예수님의 생각과 말씀은 그대로 하느님 생각과 말씀의 반영입니다. 예수님은 요즘 회자되고 있는 기본소득제의 원조임을 깨닫게 됩니다. 복음의 선한 포도밭 주인의 하늘 나라 비유를 통해 예수님이 꿈꾸는 하늘 나라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복음의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가 참 현실성을 띠며 마음에 와 닿습니다. 그대로 예수님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하느님 자비의 지평이, 시야가 참 넓고 깊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정의가 서로 만납니다. 세상인들의 상식과 공정, 정의의 잣대가 아닌 하느님 고유의 자비의 잣대입니다. 우리의 발상의 전환을, 자비의 지평을, 시야를 확장할 것을 요구합니다. 

 

내가 아닌 하느님 자비의 지평에 맞춰야 함을 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산술적 공평의 분배정의가 아닙니다. 사람마다 눈 높이에 맞춘, 각자 삶의 처지에 맞는 하느님의 자비가 그 잣대가 됩니다. 하느님 앞에는 일체의 기득권이 없습니다. 아무리 오래 잘 믿었다 하여 구원이 아니고 아무리 짧게 믿었다 하여 구원의 실격도 아닙니다. 아침 일찍부터 포도밭에서 일했던 전자의 일꾼들은 일찍부터 유대교 신자였다가 개종한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뜻하며 후자는 늦게 이교에서 개종한 신참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뜻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은 바로 이러합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마디가 이를 요약합니다. “이처럼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 두렵고 떨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평생 배우는 자세로 살아야 함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닮은 착한 목자, 자비로운 목자입니다. 앞서의 해석과 더불어 이런 차원에서 오늘 복음을 읽어야 합니다. 밥은 하늘입니다. 누구나 천부인권을 타고난 사람들입니다. 누구나 공평히 하늘인 밥을 나눠야 합니다. 아침 일찍부터 나온 일꾼들은 행운아들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일자리를 찾다가 오후 늦게 서야 일이 끝날 무렵에 비로소 일자리를 찾았던 이들에게도 필시 딸린 식솔食率도 있을 것입니다. 이들도 먹고 살아야 할 한 데나리온이 필요합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는 일한 양이 아니라 각자의 곤궁한 처지가 분별의 잣대였던 것입니다. 상식과 공정의 잣대가 아닌 각자의 처지에 맞는 무상無償의 사랑, 자비의 잣대, 은총의 잣대입니다. 그리하여 누구나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니 그대로 오늘날 회자되는 기본소득제 정신과 똑같습니다. 이 정도까지 우리도 하느님을 닮아 그분의 자비의 지평까지, 시야까지 확장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느님의 자비를, 은총을 인간 상식의 잣대로 재는 인정머리 없는 맨 먼저 왔던 자들의 항의에 대한 자비로운 목자로 상징되는 하느님의 반응이 신선한 충격입니다. 이 또한 옹졸하고 편협한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착한 목자 주님을 닮아 한없이 자비로우라는 가르침입니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요?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정곡을 찌르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제넘게 하느님 무한한 자비의 은총을 인간 상식의 잣대로 재지 말라는 것입니다. 감히 하느님의 권리에 월권越權하지 말고, 형제들과 비교하지 말고 네 분수에 만족하라는 것입니다. “니가 뭔데? 너나 잘 해!” 말마디가 그대로 해당되는 장면입니다. 이런 착한 목자와는 대조적인 것이 제1독서 요탐의 우화에 나오는 악한 목자로 상징는 가시나무,  아비멜렉 임금입니다. 

 

“스켐의 지주들이여, 내 말을 들으시오. 그래야 하느님께서도 그대들의  말을 들어 주실 것이오.”

 

요탐의 호소와 더불어 이어지는 우화입니다. 요탐의 우화중 자기 분수를 알았던 올리브 나무, 무화과 나무, 포도나무는 겸손히 사양합니다만 악한 목자 아비멜렉으로 상징되는 가시나무만이 임금되기를 선선히 받아들입니다. 어리석은 무지의 스켐의 지주들이 자초한 자업자득의 결과입니다. 후회해도 너무 늦습니다. 임금으로 뽑힌 아비멜렉을 상징하는 가시나무의 반응입니다.

 

“너희가 진실로 나에게 기름을 부어 나를 너희의 임금으로 세우며 한다면 와서 내 그늘 아래에 몸을 피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가시나무에서 불이 터져 나가 레바논의 향백 나무들을 삼켜 버리리라.”

 

스켐의 지주들이 자초한  잔혹殘酷한 임금 아비멜렉입니다. 이후 아비멜렉 임금도 불행한 최후의 죽음을 맞이하지만 스켐 사람들의 폐해 역시 상상을 초월합니다. 참으로 배움과 깨달음의 여정을 통해 하느님을 닮아 우리의 자비의 지평, 정의의 지평도 날로 확장되고 무엇보다 참 좋은 분별력의 지혜를 지녔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을 닮아 좋은 분별력의 지혜를 지닌 자비로운 목자의 영성으로 살게 하십니다.

 

“주님은 내 생명 구하여 내시고, 은총과 자비로 관을 씌워 주시는 분,

 한평생을 복으로 채워주시니, 내 청춘 독수리마냥 새로워지도다.”(시편103,4-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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