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유비무환有備無患-2021.10.16.연중 제28주간 토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Oct 16,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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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16.연중 제28주간 토요일                                                     로마4,13.16-18 루카12,8-12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유비무환有備無患-

 

 

 

“주님, 당신이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이스라엘의 하느님, 당신은 용서하시는 분이시옵니다.”(시편130,3-4)

 

오늘 미사중 입당송 후렴이 우리 영혼에 위로와 평화를 줍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제 졸저 책명이자 29년전 1992.1.15.왜관 수도원 성전에서 종신서원 미사때 제 강론 제목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아니 살아갈수록 절실해지는 평생 화두같은 물음입니다. 유비무환입니다. 하루하루의 깨달음을 마음에 새기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몇가지 깨달음의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1.요셉수도원 초창기부터 지금까지(1986-2021), 35년간 사진을 모아 원장수사가 방대한 5권의 사진첩을 만들었습니다. 새삼 감회가 새로웠고 초발심의 자세를 회복하는 호기도 됐습니다. 사실 초창기는 앞을 내다 볼 수 없으니 잘살고 못살고를 떠나 하루하루가 생존의 문제였습니다. 여섯 단어로 요약되는 삶이었습니다. ‘혼돈’, ‘무질서’, ‘젊음’, ‘순수’, ‘열정’, ‘역동성’이었고 정말 살아 있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리하여 다시 영적 젊음과 순수와 열정을 새로이 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2.엊그제의 깨달음도 잊지 못합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사제나 제관, 착한 사마리아인은 누구나의 가능성이라는 깨달음입니다. 순간적 판단과 결행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초주검이 된 이를 놔두고 슬며시 외면하고 떠난 사제와 제관을 마냥 비난할 수만을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후 집무실에서 일하다 잠시 숙소에 들렸더니 복도에서 천정 열린 문 아래에 사다리를 놓고 원장수사가 혼자 여름철에 썼던 선풍기들을 올려 놓고 있는데, 수고한다는 말만 던지고 떠나려던 차, 이게 아니다 싶어 가까이 갔습니다. 혼자 들어 올려 사다리에 올라가 넣는 작업이 참 위태해 보였습니다. 남은 큰 선풍기 3개는 번쩍 들어 전달해 올리니 간편하게 짧은 시간에 끝냈고, 참 잘했다 싶었고 순간 아찔했습니다. 

 

귀찮다는 생각에 그냥 놔두고 지나쳤다면 그대로 초주검이 된 이를 놔두고 외면하고 떠난 사제나 제관의 처지가 될뻔했습니다. 이렇다면 이건 사람이 되는 기본적 자질에 무조건 실격임을 뜻하며 내내 마음 찜찜했을 것입니다. 

 

3.‘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는 분도 성인의 말씀도 하루하루 절실히 깨어 본질적 투명한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이 또한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답이 되는 유비무환의 자세이겠습니다. 늘 생각하는 바, 일일일생, 일년사계에 견주어 내 현재 삶의 지점을 확인해 보는 것입니다. 평생을 하루로, 일년사계로 압축할 때 어느 지점에 와 있겠느냐의 확인입니다. 여기에다 내 임종어를, 또 장례미사까지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제 경우 장례미사시 입당성가는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의 ‘아무것도 너를’ 기도곡과 퇴장성가는 아씨시 프란치스코의 ‘태양의 찬가’를, 또 강론은 제 좌우명 기도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를 부탁할 생각입니다.

 

4.어제 금요강론시 귀한 깨우침을 준 내용입니다. 토마스 머튼 이후 최고라는 베네딕도 영성의 세계적 대가인 80대 초반의 오스트랄리아 출신의 트라피스트 수도사제 마이클 케이지의 인터뷰시 한 대목입니다.

 

“그렇다! 언제나 성공은 부패하기 마련이다(Always success corrupts). 너도 알겠지만, 공동체 안에서의 삶이 그것에 대한 최고의 치유제이다.”

 

참 깊은 은혜로운 통찰입니다. 내 몸담고 있는 공동체 삶이 성공에 자만하지 않고 깨어 겸손히 부패하지 않고 참 자기를 살도록 견제 역할을 해 준다는 것입니다. 예언자가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함이 그를 겸손으로 이끄는 긍정적 역할을 함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일련의 깨달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함에 대한 답이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도 우리에게 귀한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첫째,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생각과 말과 행위로 용기있게 주님을 증언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는 자각입니다. 그래야 주님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겠기 때문에 이런 증언의 삶도 참 좋은 유비무환의 삶이 될 것입니다.

 

둘째, 성령에 따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성령을 모독하는 무지의 죄는 절대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누구나에게 자명한 진리가 진리의 성령, 사랑의 성령이신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성령께, 주님께, 이웃에 활짝 열린 삶을 살아야 하겠다는 자각입니다. 

 

스스로 문을 닫아 걸고 차단함은 스스로 자초하는 심판이자 바로 성령께 대한 모독이고 이런 경우는 하느님도 어쩌지 못합니다. 그러나 고의적이고 악의적인 이런 성령 모독의 죄를 짓는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도록 늘 깨어 성령께 마음을 활짝 열고 성령께 귀기울이며 성령의 인도따라 살아가도록 하는 것 역시 참 좋은 유비무환의 삶이 되겠습니다.

 

셋째, 장차 있을 어떤 곤경이나 역경에서든 무엇을 행할까, 무엇을 말할까 미리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언젠가의 그날 그때에 앞서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성령에 따른 겸손한 삶 자체가 참 좋은 유비무환의 대책이 되겠습니다. 오늘 사는 대로 내일도 그대로 살겠기 때문입니다.

 

이 모두를 떠받쳐 주는 것이 주님께 대한 희망과 신뢰의 믿음입니다. 희망과 신뢰의 믿음은 함께 갑니다. 희망이 있기에 항구한 신뢰의 믿음이 가능합니다. 참으로 하느님께 희망을 둘 때 항구한 한결같은 믿음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로마서에서 바오로가 말하는 아브라함이 참 좋은 모범입니다. 믿음을 통하여 실현되는 하느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의 믿음이 우리의 믿음이 되도록 간청하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믿는 분, 곧 죽은 이들을 살리시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시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 모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주님 하신 말씀에 따라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희망이자 믿음입니다.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백절불굴 믿음의 삶을 살 수 있음은 한결같이 하느님께 궁극의 희망과 신뢰를 둘 때 가능합니다.

 

“행복하여라, 주님께 희망을 두는 사람!”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에 대한 궁극의 답입니다. 바로 여기서 나오는 분별의 지혜, 증언의 용기, 성령의 인도에 따른 걱정이나 두려움이 없는 삶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 유비무환의 삶을 살도록 당신께 대한 참 좋은 희망과 믿음의 은총을 선물하십니다.

 

“부자들도 궁색해져 굶주리게 되지만, 주님을 찾는 이에게는 좋은 것 뿐이리라.”(시편34,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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