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서 좋아하는 참된 단식 -이웃 사랑의 실천-2022.3.4.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Mar 04,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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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3.4.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이사58,1-9ㄴ 마태9,14-15

 

 

 

하느님께서 좋아하는 참된 단식

-이웃 사랑의 실천-

 

 

 

정치권은 물론 위로나 아래로나 옆으로나 괴물들이, 폐인들이 넘치는 세상입니다. 제대로된 참 사람들 만나보기 참 힘든 세상입니다. 사랑의 수행이 결여된 자연스런 결과들입니다. 안팎으로 참사람되는 '독립운동'이 절실한 때입니다. 날마다 눈뜨면 독립운동하는 마음으로 쓰는 강론입니다. 재의 수요일 마태복음에서 보다시피 기도, 단식, 자선은 옛 이스라엘인들은 물론 그리스도인들의 기본적이자 전통적인 수행이었습니다. 진리는 불변합니다. 여전히 오늘의 사순시기에도 절실한 수행 덕목들이자 저 역시 각별히 유념하는 덕목의 수행들입니다. 오늘 말씀 주제는 단식입니다. 복음은 ‘단식논쟁’이고 제1독서 이사야서는 ‘하느님이 좋아하는 단식’에 대한 내용입니다.

 

“88kg!”

정확히 1월20일 제 체중에 경악驚愕했습니다. 지금은 83kg으로 간신히 예전 수준으로 위치시켰지만 사순시기 단식과 절식을 통해 더 감량減量할 계획입니다. 초등학교 교사하다 수도원 입회할 당시 30대 초반에는 62kg이었고, 입회후 세끼 꼬박 충실히 제때에 따뜻한 식사하다보니 68kg, 이어 요셉수도원 부임 당시는 74kg 안팎이고, 20년전 50대 초반 신학교 강의 시절만 해도 날라다닐 듯 몸은 가벼웠습니다.

 

참으로 생각하는 바, 가장 저에게 적절한 음식량입니다. 사실 적게 못먹어 병나는 경우보다 많이 잘 먹어 병나는 경우가 많은 현실입니다. 비만, 고혈압, 고혈질, 당뇨, 암등 성인병들은 성인들뿐 아니라 젊은이들도 점차 늘어나는 추세가 이를 입증합니다. ‘우리는 갈망하는 것 자체다(We are what we desire)’란 말이 있는데, ‘우리는 먹는 것 자체다(We are what we eat)’란 식사에도 그대로 통하는 진리입니다. 갈망하는 바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고, 먹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2014년 원장 퇴임후 안식년때 20일간 단식피정시 74.5kg에 이어 산티아고 순례후 역시 74.5kg, 바로 이것이 제 한계 체중이었습니다. 그런데 88kg이라니! ‘주님의 전사戰士’를 자처하는 자신이 비만으로 배가 나왔다는 사실이 내심 부끄러웠고 새삼 단식과 절식 수행의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 몇 년전 읽은 ‘중은 절에 들어올 때의 체중을 유지해야 한다’는 법정 스님의 말도 생각났고, 70대 중반의 나이에도 고3때 57.5kg 체중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도올 김용옥 선생의 언급, 그리고 80대 후반에 돌아간 모 유명인사의 부친도 평생 52.5kg 체중으로 건강히 보냈다는 일화도 저를 부끄럽게 했습니다.

 

단식은 다이어트가 아니라 사랑의 수행입니다. 더불어 수확은 영육의 건강입니다. 동방수도영성의 대가인 에바그리우스나 가시아노의 8개 악덕, ‘탐식-음욕-물욕-분노-슬픔-나태-허영-교만’에서 보다시피 악덕은 탐식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바로 탐식의 치유를 위해 단식 수행입니다.

 

“단식을 사랑하라.”(성규4,13)

“순결을 사랑하라.”(성규4,64)

 

베네딕도 규칙서 ‘제4장 착한 일의 도구들에 대하여’ 78절까지 나오는 긴 목록중 둘입니다. 깊이 들여다 보면 탐식과 성욕이 붙어있습니다. 성욕, 음욕의 뿌리인 탐식을 절제해야 성욕이 절제됩니다. 그러니 단식을, 순결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나오는 대목은 이 둘입니다. 자발적 기쁨의 사랑의 수행으로 단식과 순결의 정신을 깊이 내면화하는 것입니다. 

 

단식과 순결만이 아니라 침묵, 겸손, 노동, 가난, 공부, 순종, 수도생활등 모든 수행을 억지로나, 의무로 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모든 수행들은 회개의 표현들이자 동시에 하느님 사랑의 표현들입니다. 이런 사랑의 수행들을 통해 마음의 순수와 자유로움이요, 이 자유는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섬김으로 표현될 때 비로소 수행의 완성입니다. 

 

단식 역시 사랑의 수행입니다. 단식 자체가 절대적 가치가 아닌 상대적 가치입니다. 한참 성장중인 청소년들이나 육체적 중노동자들, 배고파 굶주린 자들은 단식이 아닌 충분히 먹어 영양을 섭취해야 합니다. 사실 50년대 제 초등학교 시절 시골에는 겨울 추위에 손트는 아이들도, 영양실조로 코흘리고 부스럼난 아이들도 참 많았습니다. 침묵 역시 절대적 가치가 아닙니다. 말많이 하는 직업을 가진 법조인들이나 성직자들이나 교사들이 각별히 유념해야할 침묵의 덕이지 독거 노인들은 침묵이 아니라 말할 기회가 많이 주어져 자기 표현을 해야 합니다. 가난 덕목 역시 가난한 자들이 아니 부자들에게 강조할 덕목입니다.

 

예수님 역시 단식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절대적 법은 단식이나 기타 수행들이 아닌 사랑뿐이었고 모두는 상대적 가치의 수행들입니다. 과도한 단식으로 건강을 해치는 것 역시 분별 부족의 어리석은 일입니다. 성 바실리오, 성 베르나르도, 토마스 머튼이 과도한 단식의 수행으로 평생을 소화불량의 위장병으로 고생했습니다. 베네딕도를 비롯한 모든 영성대가들의 가르침은 중용입니다. 한결같이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는 영육의 균형과 조화를 깨지 않는 수행들을 권했습니다.

 

“먹고 겸손한 것이 안먹고 교만한 것보다 낫다!”

 

100% 공감하는 간단명료한 진리입니다. 모든 진짜 수행은 ‘사랑의 수행’이자 ‘겸손의 수행’입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단식도 모두에게 감쪽같이 감춰진, 하느님만이 아시는, 하느님 중심의 허영과 교만이 배제된 진실하고 겸손한, 자발적 기쁨의 단식이라는 사랑의 수행입니다. 참으로 제일 좋은 단식은 사랑의 단식입니다. 단식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래야 다음과 같은 진짜 단식을 할 수 있습니다.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에고를 만족시켜 주는 자기도취의 허영의 단식이 아닌, 이런 하느님 중심의 겸손한, 감춰진 사랑의 단식이 예수님이, 하느님이 바라시는 진짜 단식입니다. 단식은 영적 경쟁의 대상도 아니며 구원의 조건도 아닙니다. 단식 잘 해서 구원이 아니라 사랑으로 구원받습니다. 중요한 것은 단식의 횟수가 아니라 자발적 기쁨의 시기적절한 때의 분별력있는 단식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요한의 제자들의 단식에 대한 편견을 바로 잡아 줍니다. 아무 때나 단식이 아니라 신랑을 빼앗길 날, 적절한 때 단식할 것이고 신랑인 주님과 함께 있는 축제의 시기는 삶을 즐기라는 것입니다. 축제인생을 고해인생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먹보요 술꾼이라 불릴만큼 자유로웠지만 광야의 유혹사화에서 보다시피 적절한 때에는 칼같이 단식을 하셨습니다. 아마도 외딴곳에서의 매일 밤샘 기도는 거의 단식 상태에서 하셨을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단식의 정신입니다. 단식을 넘어 모든 삶에서 절제와 자제, 극기로 적게 먹고 적게 쓰는 간소簡素하고 질박質樸한 의식주 생활로 쓰레기를 양산하지 않는 삶이 궁극의 목표입니다.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삶으로 지구 자원이 고갈되는 현실에서 더욱 절실한 생태적 회개의 실천, 이 또한 참된 단식의 정신입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참으로 하느님께서 좋아하는 단식의 핵심을 통쾌하게 밝혀줍니다. 모든 단식이 지향하는 궁극의 목표인 참된 단식입니다. 길다 싶지만 전문 그대로 인용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1.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2.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3.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4.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 5.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6.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7.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고, 8.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참으로 이웃을 해방하여 자유롭게 하는 사랑의 실천이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참된 단식이라는 것입니다. 8개 항목에 내 사랑의 실천을 비춰보면 자신의 부끄러움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이런 참된 단식의 정신인 사랑의 실천가들에게 햇살같이 쏟아지는 주님의 은총에 치유의 축복입니다.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 바로 아물리라. 너의 상처가 곧 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그때 네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하고 말씀해 주시리라.”

 

얼마나 신바람 나는 고무적인 말씀인지요! 바로 이것이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참된 단식의 결과 주어지는 빛과 생명으로 넘치는 은총의 축복입니다.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참된 사랑의 단식에 사랑의 모든 수행들이요 사순시기 집중적으로 훈련해야 할 수행 덕목들입니다. 이래야 괴물이, 폐인이 되지 않고 참된 사람이, 참된 주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참 사람 만나보기 힘든 괴물들로 폐인들로 넘쳐나는 세상같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이 좋아하시는 당신 사랑의 참된 수행자로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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