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와 삶 -참된 기도, 참된 회개, 참된 삶-2022.3.26.사순 제3주간 토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Mar 26,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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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3.26.사순 제3주간 토요일                                                             호세6,1-6 루카18,9-14

 

 

 

기도와 삶

-참된 기도, 참된 회개, 참된 삶-

 

 

 

“광풍을 순풍으로 가라앉히사

바다의 물결이 잔잔해지니

 

잔잔해져 좋아라 날뛰던 그들을

희망의 포구로 이끄셨도다

 

주님께 감사하라, 그 자비하심을

중생에게 베푸신 그 기적들을”(시편107,29-31)

 

아침 성무일도 시편중 위로와 평화를 선물한 구절입니다. 참으로 위기의 시대요 비상 시국입니다. 작금의 국내외 상황이 바로 그러합니다. 믿는 이건 믿지 않는 이건 모두의 참된 회개가 참으로 절박한 사순시기입니다. 말그대로 길을 잃은 세대, 중심을 잃은 세대, 희망을 잃은 세대, 의미를 잃은 세대, 총체적 난국의 세대입니다. 수도원에도 사상 초유의 전무후무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하느님의 집인 수도원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코로나의 집단 감염으로 3.16일부터 3.23일 까지 공동체가 시편성무일도와 미사의 공동전례기도와 공동식사도 못하고 개인적 치유기간을 갖다가 모두가 회복되어 다소간의 후유증은 있지만 엊그제 3.24일부터 종전 일과표대로 새롭게 시작했습니다. 이 거룩한 은총의 사순시기,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코로나를 통해 공동체에 특별 개인 회개 피정을 선물하신 것입니다. 오히려 영적 전의가 살아나는 느낌입니다.

 

참으로 기후 위기 시대, 사순시기에 회개하라는 회개의 표징같은 코로나 사태입니다. 개인적인 회개가 아니라 거족적, 거국적 회개입니다. 모두가 한배에 타고있는 공동운명체같은 지구 가족입니다. 마침 어제 금요 강론시 원장수사의 기후위기의 시대에 사회교리중 다음 말마디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물론 지금 우리 세대는 괜찮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도 인생 말년을 맞이하는 2050년 경이면 지구는 기후위기로 큰 몸살을 앓을 것이며 이후의 세대의 생존도 불확실 할 것입니다.”

 

이런 기후위기와의 전쟁, 코로나와의 전쟁, 온갖 내전 상태를 방불케하는 위기의 시대, 광기狂氣의 시대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와의 참혹한 전쟁이라니요! 결코 강건너 불이 아닙니다. 깨어 지혜롭게 대처하지 않으면 우리 한반도에도 옮겨 붙을 지도 모를 산불같은 전화戰禍의 재앙일 것입니다. 화면에서 보는 전쟁 게임이 지금 현실에서 전개되고 있습니다. 역설적으로 무지無知한 문명文明의 야만野蠻시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누구나 통과해 나가야 할 일상이 된 코로나 사태요, 참으로 ‘참된 기도’, ‘참된 회개’를 통해 ‘참된 삶’을 살라는 깨우침을 줍니다. 물론 저는 경미했던 덕분에 그 불편한 와중에도 매일 강론을 썼고 일찍 회복된 형제와 함께 매일미사를 공동체를 대표하여 집무실에서 봉헌했습니다. 어제 끝기도시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세계 전 가톨릭 교회에 대한 간곡한 호소에 응답해 A4 용지 두쪽의 방대한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께 바치는 봉헌 기도”를 바쳤습니다. 끝기도가 30분 걸려 끝나기도 사상 초유의 일입니다.

 

“오, 하느님의 어머니시며 저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 

이 고난의 시기에 저희가 당신께 의탁하나이다. 당신께서는 저희를 사랑하시고 저희를 아시는 어머니이시니, 저희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을 아시나이다. 자비로우신 어머니, 평화의 임금이신 예수님께 저희를 인도하시는 당신의 애틋한 사랑과 평화를 주시는 당신의 현존을 저희는 체험해 왔나이다. 그러나 저희는 평화로 가는 길을 잃었나이다.”

 

반성과 통회로 시작하는 장문의 기도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후 이런저런 걱정스런 마음에 잠깨니 밤12시 자정입니다. 엊저녁부터 내리는 메마른 대지를 촉촉이 적시며 마음을 고요하고 평화롭게 하는 위로의 봄비가 참 고마웠습니다. 아주 예전 이맘때쯤 써놨던 ‘봄비’라는 시도 생각났습니다.

 

“마음을 촉촉이 적시는

봄비!

하늘 은총

내 딸 아이 하나 있다면

이름은 무조건

‘봄비’로 하겠다”-2005.3.

 

정말 봄비같은 딸 아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참으로 메마른 세상을 촉촉이 적시는 봄비의 예수님같은 위로와 평화, 겸손과 온유의 사람들이 목마르게 그리운 시절입니다. 이래서 참된 기도, 참된 회개, 참된 삶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제1독서 호세아 예언자를 통한 주님의 말씀이 참으로 고맙게도 위로의 봄비처럼 우리의 메마른 마음을 촉촉이 적시며 치유하십니다.

 

“자, 주님께 돌아가자. 그분께서 우리를 잡아 찢으셨지만 아픈 데를 고쳐 주시고, 우리를 치셨지만 싸매 주시리라. 이틀 뒤에 우리를 살려 주시고, 사흘째 되는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어, 우리가 그분 앞에서 살게 되리라. 그러니 주님을 알자. 주님을 알도록 힘쓰자. 그분의 오심은 새벽처럼 어김없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비처럼,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시리라.”

 

대지를 촉촉이 적시는 봄비처럼 오시는 주님이십니다. 한밤중 밖에는 계속 봄비가 내립니다. 참으로 사람이라면 종교에 상관없이 누구나 평생 공부해야 할 하느님 공부입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만이 작금의 방황하는 우리 인간의 궁극의 길이요 중심이요 의미요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호세아 예언자를 통한 주님의 말씀은 그대로 오늘 우리 모두를 두고 하는 탄식처럼 들려 섬뜩한 느낌마져 듭니다. 바로 우리 모두가 에프라임이요 유다입니다.

 

“에프라임아, 내가 너희를 어찌하면 좋겠느냐? 유다야, 내가 너희를 어찌하면 좋겠느냐? 너희의 신의는 아침 구름 같고, 이내 사라지고 마는 이슬같다. 그래서 나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들을 찍어 넘어뜨리고, 내 입에서 나가는 말로 그들을 죽여, 나의 심판이 빛처럼 솟아오르게 하였다.”

 

작금의 위기의 상황이 이미 시작된 하느님의 심판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참으로 절박한 회개의 사순시기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이 호세아서 마지막 말마디 다음 구절로 요약됩니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信義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叡智다.”

 

희생 제물이나 번제물의 거부가 아니라 우선순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본말전도, 주객전도의 상황을 바로 잡으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신의, 하느님을 아는 예지가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다음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나는 너를 영원히 아내로 삼으리라. 정의와 공정으로써, 신의와 자비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라. 또 진실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니 그러면 네가 주님을 알리라.”(호세2,21-22)

 

그러니 참되 기도와 참된 회개를 통해 하느님을 닮아 정의와 공정, 신의와 예지, 자비와 진실의 참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에 대한 답을 주님이 오늘 복음에서 주십니다. 제대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기도와 삶은 함께 갑니다. 기도하는 대로 살고 사는 대로 기도합니다. 기도가 삶의 꼴을 결정합니다. 

 

바리사이의 기도는 하나마나의 독백의 기도입니다. 엄밀히 말해 기도가 아니라 하느님과 전혀 무관한 자기도취의 자기 자랑이라 언급할 가치도 없습니다. 참으로 회개해야할 사람은 바리사이지만 자기 편집증이 강한 자칭 의인이라 여기는 ‘에고ego의 화신’같은 무지의 사람이기에 회개도 난망難望합니다.

 

진실한 기도는 짧고 순수합니다. 말그대로 회개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기도입니다. 바리사이와 세리, 똑같이 “오, 하느님!”으로 시작합니다만 내용은 천지 차이입니다. 꼿꼿이 서서 기도하는 바리사이와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는 세리가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제대로 자비송 기도를 바치는 세리입니다. 바로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간 것은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였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입니다. 진실한 회개로 자신을 겸손히 낮추어 비울 때 하느님은 그를 높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주님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6,6)

 

사부 성 베네딕도의 가르침도 주님의 가르침과 같은 맥락에 있음을 봅니다. 흡사 오늘 복음의 세리의 기도를 연상케 합니다.

 

“많은 말로써가 아니라, 마음의 순결함과 통회의 눈물로써 우리 간청이 들어 허락되는 것임을 알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가 하느님의 은총에서 받은 열정으로 길어지는 경우가 아니라면, 기도는 짧고 순수해야 한다.”(성규20,3-4)

 

기도와 삶은 함께 갑니다. 기도가 삶의 꼴을 형성합니다. 기도는 참되고 간절하고 한결같아야 합니다. 참된 기도에 참된 회개, 참된 삶이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참된 기도와 참된 회개를 통해 참된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앞서의 기도문 일부로 강론을 마칩니다.

 

“어머니, 저희의 간청을 들어주소서.

바다의 별이신 어머니, 저희가 전쟁의 풍랑 속에서 난파되지 않도록 하소서.

새 계약의 궤이신 어머니, 화해의 계획과 길에 영감을 주소서.

 

‘천상의 땅’이신 어머니, 세상에 하느님의 화합을 가르쳐주소서.

증오를 없애시고, 복수를 진정시키며, 용서를 가르쳐주소서.

전쟁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시고, 핵위협에서 세상을 보호하소서.

 

묵주기도의 모후, 저희 안에 기도와 사랑의 필요를 일깨워주소서.

인류 가족의 모후, 저희에게 형제애의 길을 보여주소서.

평화의 모후, 세계에 평화를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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