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찾아오시는 하느님 -생명, 일치, 찬양-2022.9.13.화요일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344/349-407) 기념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Sep 13,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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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9.13.화요일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344/349-407) 기념일

1코린12,12-14.27-31ㄱ 루가7,11-17

 

 

 

사람을 찾아오시는 하느님

-생명, 일치, 찬양-

 

 

 

강론 쓰기전 우선 생각하는 것이 강론 주제를 나타내는 제목입니다. 방금 읽은 오늘 복음을 요약하는 알렐루야 복음 환호송이 은혜롭습니다. “우리 가운데 큰 예언자가 나타나셨네.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네.” 바로 여기서 착안한 강론 제목 ‘사람을 찾아오시는 하느님’입니다. 

 

‘사람을 찾는 하느님’(이현주 역)은 유대인 랍비 신비주의자 아브라함 여호수아 헤셀의 작품으로 제가 오랜동안 밑줄치며 메모하며, 열광하며 읽었던 책명이기도 합니다. 읽을 때 마다 늘 새로운 가르침과 깨우침을 얻었던 책입니다.

 

우리 수도자를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라 정의하는데, ‘하느님을 찾는 사람’만 있는게 아니라, 반대로 ‘사람을 찾는 하느님’도 있습니다. 사람을 찾아오신 하느님이기에 비로소 하느님을 찾는 삶이 가능해졌습니다. 바로 이를 노래한 제 예전 짧은 자작 애송시가 생각납니다.

 

“나무에게 하늘은 가도가도 멀기만 하다.

 아예 고요한 호수가 되어 하늘을 담자.”-1997.2

 

그러니 하느님을 찾는 고단한 구도求道의 삶을 잠시 멈추고 하늘을 담는 호수처럼, 찾아오신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관상적 휴식을 즐기자는 요지의 시입니다. 찾아오시는 겸손한 사랑의 하느님이 바로 예수님이요 성령님이요 바로 이것이 복음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환대하여 마음속 깊이 모시는 참으로 복된 시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기도하듯이 “오소서 예수여”, “오소서 성령님”을 노래하기도 합니다.

 

“오소서 주 예수여, 이 마음에 오소서.”(성가153)

“오소서 성령이여, 우리 맘에 오소서.”(성가142)

 

'오소서, 주 예수님' '오소서, 성령님' 바로 제가 호흡에 맞춰 기도하는 성구(만트라)입니다. 이리하여 그리스도를 호흡하며 사는 삶이 실현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시는 일화입니다. 복음의 청중들은 물론 미사에 참석한 우리 역시 예수님이 바로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느님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오로지 희망을 걸었던 외아들의 죽음은 과부 어머니에게 얼마나 큰 슬픔이었을까요! 

 

오늘 복음 장면이 그림처럼 선명합니다. 죽음의 대열과 생명의 대열이 조우遭遇합니다. 그대로 파스카의 기적이 일어나기 직전입니다. 생명과 빛, 희망의 대열을 상징하는 예수님과 제자들 일행과 외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죽음과 어둠, 절망의 대열을 상징하는 과부 일행의 극적인 만남입니다. 

 

우연이 아닌 분명 과부의 울부짖음이 하느님께 도달되어 마침내 예수님이 찾아오셨으니 그대로 섭리의 은총입니다. 다음 그림처럼 선명한 감동적인 대목은 그대로 예수님을 통한 자비로운 하느님의 개입을 보여줍니다.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하고 이르시고는,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얼마나 멋진 예수님이신지요! 바로 하느님은 이런분입니다. 주님과의 만남으로 파스카 신비의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순간 죽음은 생명으로, 어둠은 빛으로, 절망은 희망으로 돌변한 것입니다.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이 바로 생명의 하느님이심을 입증한 것입니다. 

 

하느님을 그대로 반영하는 예수님은 그대로 하느님의 현현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강조하신 하느님의 세 특성이 그대로 예수님을 통해 드러납니다. ‘가까이 계심(closeness)’, ‘연민(compassion)’, 그리고 ‘부드러움(tenderness)’입니다. 참으로 하느님께 가까워질수록 예수님처럼 우리도 연민과 부드러움, 겸손과 지혜의 사람이 될 수 있고, 우리 모두의 소망이기도 할 것입니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오늘 복음의 핵심 말마디이며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을 향한 명령입니다. ‘일어나라’는 말마디는 부활에 쓰이는 단어입니다. 살아있다 하나 실상 영혼은 시들어 죽어가는 이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바로 이런 우리들을 영적 죽음으로부터 살려내는 말씀입니다. 흡사 나자로를 살려낼 때 “라자로야 나오너라”(요한11,43)는 장면을, 회당장의 딸을 살리실 때 “탈리타 쿰, 소녀야 일어나라”(마르5,41)는 은혜로운 장면을 연상케 합니다.

 

무기력, 무의욕, 무감각한 마음이 들 때, 좌절감이나 자포자기 절망감이나 원망, 실망하는 마음이 되어 영혼이 시들어 죽어간다 생각될 때 지체없이 “젊은이야, 일어나라.” 주님의 말씀을 연상하여 즉시 일어나 다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 앞에 모든 이가 ‘젊은이’이기 때문입니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다시 시작하는 것이 바로 파스카의 삶입니다. 넘어지는 게 죄가 아니라 자포자기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게 대죄라는 것이 제 지론입니다. 이렇게 넘어지면 즉시 일어나 다시 시작해야 영적탄력도 영적감성도 손상되지 않습니다. 우울증이나 치매에도 걸리지 않습니다. 곤경에 처할 때 마다 우리를 찾아오시는 파스카의 예수님이 계시기에 이런 파스카의 삶이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를 찾아오시는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은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셨듯이 우리 하나하나를 살리시고, 이어 공동체에 일치와 평화를 선물하십니다. 오늘 제1독서는 하나인 몸과 여러 지체들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한 몸 공동체에 대해, 또 교회의 다양한 은사에 대해 귀한 가르침을 줍니다.

 

주님은 우리를 살리실 뿐 아니라 살아 있는 유기적 그리스도의 한 몸 공동체로 만들어 주시며 공동체의 세가지 특징은 일치성, 다양성, 연대성입니다. 이런 상호보완의 일치와 평화의 공동체는 그대로 하느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바로 다음 말씀이 이를 입증합니다.

 

“하느님께서 교회에 세우신 이들은 첫째가 사도들이고 둘째가 예언자들이며, 셋째가 교사들입니다.”

 

이어지는 공동체 형제들의 받은 은사가 모두 주님의 선물임을 깨닫게 됩니다. 정말 ‘신의 한 수’와도 같은 주님의 선물들로 이뤄진 여기 우리 수도공동체입니다. 살아갈수록 공동체 형제들에 대한 고마움도 날로 커집니다. 그리하여 변함없는 제 고백이 지금도 여전히 게시판에 붙어 있습니다.

 

“저에게 가장 큰 스승은 여기 몸담고 살아가는 수도공동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신 똑같은 부활과 생명의 주님께서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를 살리시고 공동체에 일치와 평화를 선물하십니다. 이에 대한 감사의 응답은 무엇일까요?

 

하느님께 찬양과 찬미를,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신 주님을 뵌 군중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했다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움이 아닌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찬양과 찬미를, 영광을 드립니다. 바로 우리의 마땅한 응답이요, 그리하여 끊임없이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기도를 바치는 우리들입니다.

 

오늘은 동방 4대 교부들(아타나시오, 바실리오, 요한 크리소스토모, 나지안죠의 그레고리오)중 하나인 개혁가이자 예언자이자 교회학자인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학자 기념일입니다. 참으로 전폭적으로 신자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파란만장한 삶에 탁월한 설교로 ‘황금의 입’, 금구金口라는 불리는 성인으로 설교자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수차례의 유배중 마지막 유배시 임종때의 일화도 감동적입니다. 전설적인 신비스런 일화를 소개합니다. 마지막 임종처는 순교자 바실리쿠스(+311) 작은 경당입니다.

 

임종하던 날 밤, 순교 성인 바실리쿠스가 꿈에 요한 크리소스토모에게 나타나 “마음을 편히 가지시오. 요한 형제, 아침이면 우리와 함께 있을 것이오.” 말했다 하며, 이 꿈에 앞서 바실리쿠스 경당 사제에게도 꿈에 나타나 “요한 형제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게. 그가 오고 있네.”라고 말했다 합니다. 새삼 우연은 없고 자비로운 하느님의 섭리하에 있는 믿는 이들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임종시 장면입니다.

 

요한은 흰 수의를 덮어 줄 것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자기 옷은 그가 감격스럽게 읽었던 위대한 은수자 안토니오를 본받아 둘러서 있는 사람들에게 선사합니다. 그런 다음 마지막 임종기도를 바칩니다.

 

“하느님은 모든 일에 찬미받으소서.”

 

또는 이를 “모든 것을 통하여 하느님께 영광을”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만 결국은 같은 내용입니다. 평생 하느님께 찬양과 찬미, 영광을 돌렸던 삶의 요약과도 같은 임종어는 흡사 수도원 정문의 “모든 일에 하느님께 영광”이란 성규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강요된 고통으로 사망할 당시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나이는 대략 58세였다 합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새 생명과 일치, 평화를 선물하시며, 우리는 주님께 감사의 찬양으로 응답하는 복된 시간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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