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의 여정 -“회개의 표징, 구원의 표징; 라자로”-

by 프란치스코 posted Mar 09,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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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3.9.사순 제2주간 목요일                                                             예레17,5-10 루카16,19-31

 

 

회개의 여정

-“회개의 표징, 구원의 표징; 라자로”-

 

 

아마 강론 주제로 저보다 여정이란 단어를 많이 사용한 사제는 없을 것입니다. 2014년 산티아고 성지순례후 참 많이 강론 주제로 등장한 여정이란 말마디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우연한 목적없는 삶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여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살아갈수록 날로 하느님을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 날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자주 하느님의 거울에, 말씀의 거울에, 성사聖事의 거울에 자기 얼굴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과연 날로 주님의 얼굴을 닮아가는 영혼의 얼굴입니까? 예수님께서도 천국 입장시 당신 얼굴을 닮았는지 각자의 얼굴을 살피실 것입니다. 

 

이래서 평생 기도와 더불어 회개의 여정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특히 사순시기는 집중적으로 회개 훈련에 집중하는 영적으로 중요한 시기입니다. 오늘 복음의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도 우리의 내적 상태를 돌아보게 합니다. 과연 나는 어디에 속합니까? 

 

참 극명한 대조와 더불어 크나큰 가르침과 깨우침을 주는, 우리에게 부단한 회개의 표징, 구원의 표징이 되는 비유입니다. 우선 주목되는 바 부자는 이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물질적 소유는 많았지만 이름이 없으니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면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의 이름입니다. 이름이 있으니 이름없는 부자와는 달리 참으로 존재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 도와 주신다’는 뜻이 라자로이니 얼마나 멋진 이름인지요! 복음 서두 묘사부터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했다.”

 

눈으로 보듯 참 실감나는 장면입니다. 도대체 부자의 잘못이, 죄가 무엇인지 담박에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잘 들여다보면 부자가 얼마나 무지한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완전히 외부와 차단된 고립단절된 자기안에 갇힌 수인의 삶입니다. 순전히 자기만을 위한 삶입니다. 

 

위의 하느님께 열린 창도 없고, 좌우사방 이웃에 열린 창도 없고, 참나에게로 열린 내면의 창도 없습니다. 라자로도 자기와 같은 사람이 아닌 그저 무관한 사물처럼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완전 무관심, 무관계의 라자로입니다. 완전히 무지에 눈먼 비인간화된 말그대로 괴물이 된 부자입니다.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 아닙니다. 이와같은 무지의 괴물같은 부자도 부지기 수일 것입니다. 

 

이래서 회개의 삶이 참 절박합니다. 한두번이 아니라 평생 회개의 여정에 충실할 때 비로소 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자와 라자로는 강렬한 회개의 표징이 됩니다. 나는 부자처럼 무지에 눈멀지는 않았는가? 자기만을 위한 고립단절의 수인은 아닌가? 과연 내 주변에는 라자로는 없는가? 

 

부자는 회개의 표징이자 구원의 표징인 라자로를 까맣게 잊고 지냈으니 내면은 그대로 감옥이자 지옥이었을 것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가 두 사람의 내면 상태에 대한 묘사처럼 생각됩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 그는 사막의 덤불과 같아, 좋은 일이 찾아드는 것도 보지 못하리라. 그는 광야의 메마른 곳에서, 인적없는 소금땅에 살리라.”

 

그대로 복음의 탐욕의 무지에 눈먼 어리석은 부자의 내면을 상징합니다. 비단 부자뿐 아니라 하느님을, 자기를 잊고 이런 무의미한 허무한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 또한 얼마나 많겠는지요! 살아있어도 참으로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면 후반부의 묘사는 하느님과 이웃을 향해 활짝 열려 있는 내면의 부자 라자로에 대한 묘사같습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얼마나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라자로와 부자인지요! 새삼 회개도, 구원의 행복도 선택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주님을 선택하여 신뢰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선택과 더불어 부단한 회개의 선택입니다. 위로의 하느님과, 옆으로 이웃에게, 그리고 자기에로 활짝 열린 삶입니다. 

 

살아있을 때 기도와 회개요, 찬미와 감사요. 사랑이요 희망이요 믿음이지 죽으면 모두가 끝입니다. 보십시오. 부자와 라자로는 사후 그 삶이 반전되어 고정됨으로 더 이상 희망도 기대도 사라졌습니다. 저승에서 고통중인 부자가 도움을 청하나 아브라함의 대답은 참 적확하고 냉정합니다. 

 

이제 천상의 라자로와 저승의 부자 사이는 큰 구렁이 가로 놓여 있어 건널 수 없다 합니다. 이미 살아서부터 둘 사이는 건널 수 없었던 불통과 무관계의 큰 구렁이 있었음을 깨닫습니다. 

 

다급해진 부자는 라자로를 자기 집에 보내어 자기 형제들에게 회개를 촉구해 달라 당부하지만 거절됩니다.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정말 간절히 청할 바 회개의 은총이요, 다음 이사야서 말씀이 더욱 회개의 은총을 청하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더 교활하여, 치유될 가망이 없으니, 누가 그 마음을 알리오? 내가 바로 마음을 살피고, 속을 떠보는 주님이다. 나는 사람마다 제 길에 따라, 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 갚는다.”

 

사람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끊임없는 회개의 여정을 통해 하느님을 닮아갈수록 정화되고 치유되어 본연의 참내가 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회개와 더불어 이미 지상에서 주님과 함께 천상의 행복을 앞당겨 살게하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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