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覺)의 여정 -모두가 은총의 선물이다-2020.8.13.연중 제19주간 목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Aug 13,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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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8.13.연중 제19주간 목요일                                                     에제12,1-12 마태18,21-19,1

 

 

 

깨달음(覺)의 여정

-모두가 은총의 선물이다-

 

 

 

‘국제적 수도승 삶의 연대’란 영문 소식 책자의 제목이 반가웠습니다. ‘수도승의 이상적 삶과 죽음(The Monastic Ideal of Life and Death)’이란 제목이었습니다. 저는 강론 원고중 마음 깊이 각인 시키고 싶은 중요한 말마디에는 때로 반드시 괄호를 열고 한자나 영어를 집어 넣습니다. 

 

참으로 살기위해, 참으로 죽기위해 이상적 삶과 죽음에 대한 탐구는 필수이겠습니다. 모든 시험이 날짜가 있지만 일생일대 최종의 마지막 시험인 죽음은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벼락 공부는 어불성설이고 늘 깨어 삶과 죽음을 공부하며 죽음을 준비했다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어느 수도원이든 찾을 때 마다 우선 살펴 확인해 보는 것이 수도원 묘지입니다. 유럽 수도원들은 광대하고 수려한 터전에 자리잡고 있으며 내부의 한적한 자리에 수도원 묘지가 있습니다. 찾을 때마다 고향에 온 듯 편안함을 느낍니다.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마음도 정리되고 참 홀가분해지는 느낌입니다. 자기비움의 수련에 수도원 묘지는 참 좋은 공부의 장입니다. 흡사 성지 순례의 느낌입니다.

 

왜관 수도원에 머물 때도 수도원 외곽의 낙동강 변, 산비탈에 위치한 수도원 묘지를 찾았고, 미국 뉴저지주에 있는 뉴턴 수도원에 2차례 얼마 동안 머물 때도 매일 수도원 묘지를 찾아 순례하는 것도 일과 중의 하나였습니다. 지금도 눈에 밟히는 그리움의 처소가 수도원 묘지입니다. 

 

삶과 죽음의 파스카 신비의 묵상과 삶에 참 좋은 공부처가 묘지입니다. 일반인들과 달리 묘비석에 묘비명은 없고 이름과 생몰연대만 나와 있는 수도원 묘지입니다. 일반인들의 묘지 역시 방문시에는 늘 확인해 보는 것이 생몰연대와 묘비명입니다.

 

죽음이 있어 삶이 참 귀한 하느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수도원 묘지 순례가 심기일전, 역설적으로 오늘 지금 여기서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하루를 살아도 평생을 살 듯 샘솟는 열정으로 늘 새로운 시작의 삶을 살게 합니다. 

 

요즘 산책시 자주 불렀던 동요와 더불어 생각나 부르기 시작한 아주 예전 즐겨 불렀던 ‘일터로 가자’ 노래입니다. 8.15이후 농촌 계몽과 동시에 ‘상록수’와 ‘흙’이라는 소설이 유행하며 4H운동과 함께 농촌에서 즐겨 불렀던 민요풍의 노래입니다. 가사도 곡도 아름다운 자연환경의 배밭 농사가 주업인 요셉 수도원 분위기에도 참 잘 어울리는 노래 1절과 3절을 소개합니다.

 

-“저건너 푸른봉에 구름헤치고 태양이 솟아오니 어화 새날이로구나

시냇물이 굽이굽이 감도는 들에 이슬맞어 젖는 흙은 향기를 풍긴다

(후렴) 어화 어화 어화데야 일터로 가자 이나라의 주인인 너와 나로구나

 

 낙원이 어데냐고 묻지말게나 심으며 웃는 얼굴 어화 낙원이로구나

 내가슴엔 비가개어 하늘 푸르고 내가슴엔 언제나 봄바람 분다”-

 

얼마나 아름답고 흥겨운지요. 그대로 은총 넘치는 찬미가 같습니다. 여기 수도원 산책중 가끔 부르다 요즘은 매일 부릅니다. 이제는 동요와 더불어 성가의 좋고 쉬운 찬미가부터 배우는 마음으로 부르려 합니다. 사실 성가책 없이 제대로 끝까지 부르는 성가가 거의 없어 보지 않고도 외워 부르기 위함입니다.

 

하루 삶의 모든 계기를 깨달음의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모두가 은총의 선물입니다. 이런 찬미와 감사의 삶의 생활화, 일상화와 더불어 행복한 깨달음의 여정을 살게 되는 우리들입니다. 무엇보다 이런 찬미와 감사의 삶중에 하느님과 나에 대한 앎도 깊어져 무지로부터의 해방이 점차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서 나온 행복기도의 고백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모두가 당신 은총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야 하는 하늘 나라 천국의 기쁨과 행복입니다. 하늘 나라의 빛이 무지의 어둠을 몰아낼 때 ‘무지의 늪’은 ‘지혜의 숲’으로 변합니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가 확연해 집니다. 도대체 예나 이제나 무지의 사람들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복음의 예수님과 제1독서의 에제키엘 예언자만이 무지에서 해방된 자유인이자 현자입니다.

 

오늘 복음은 무자비한, 매정한 종의 비유입니다. 정말 인정머리없는 인색한 무지한 종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마디도 있지만 정말 ‘자기인식(self-knowledge)’에는 빵점입니다. 만 탈렌트 천문학적 빚을 탕감받은 자가 조족지혈鳥足之血, 고작 백데나리온 빚진 자에게 그토록 모질게 대하다니요. 아, 바로 무지의 탐욕에 눈멀 때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바로 만탈렌트 빚진 자는 하느님께 무한한 사랑의 빚을 지고 살아가는 우리들이요, 백탈렌트 빚진 자는 내 주변의 가난한 형제들입니다. 

 

“이 악한 종아,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무자비한 무지한 종에 대한 호된 질책이 우리의 ‘무지의 눈’을 활짝 회개의 깨달음으로 이끌어 삶의 실재와 진실을 보게 합니다. 깨달을 ‘각覺’자 한자 안에 ‘볼 견見’이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참으로 우리가 만탈렌트 사랑의 빚을 지고 살아가는 은총의 선물로 가득한 인생임을 깨달아 안다면 저절로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요 형제들에 대한 온갖 맺혔던 것도 저절로 다 풀리고 너그럽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동병상련의 연민으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평화공존의 삶을 살 것입니다. 

 

형제가 나에게 죄를 지으면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번의 무한한 용서도 저절로 가능해 집니다. 이것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의 해소입니다. 무지로 인한 문제라 깨달아 알게 되면 해결이 아닌 저절로 용서요 해소라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주님은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해 이스라엘의 멸망을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예전에는 하느님의 행동이 곧 예표였다면, 이사야 이후부터는 예언자 자신이 하느님께서 장차 이루실 일에 대한 예표가 됩니다. 오늘날도 눈만 열리면 주변에서 ‘회개의 예표’같은 사건들이나 형제들을 무수히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코로나19, 팬데믹 바이러스 감염병도 일종의 회개의 예표갈은 전대미문의 사건입니다.

 

바로 ‘반항의 집안’으로 지칭되는 무지의 죄악으로 눈먼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질책은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의 우리에 대한 회개의 촉구 말씀처럼 들립니다.

 

“사람의 아들아. 너는 반항의 집안 한가운데에서 살고 있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않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않는다. 그들은 반항의 집안이기 때문이다.”

 

새삼 무지의 죄악에 대한 책임에서 면제될 수 없는 우리임을 깨닫습니다. 육신의 눈은 멀쩡해도 보지 못하는, 육신의 귀는 멀쩡해도 듣지 못하는 무지의 죄악에 병든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회개의 은총을 위해 하느님을 향해 마음의 눈을, 마음의 귀를 활짝 여는 한결같은 의도적 노력이 참으로 절실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깨달음의 여정’에 항구함은 물론 ‘모두가 하느님 은총의 선물’임을 깨달아 알게 하시어 자유로운 현자가 되어 찬미와 감사의 삶에 전념하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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