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중심中心의 삶 -희년禧年의 영성-2021.7.31.토요일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1491-1556) 기념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Jul 3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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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7.31.토요일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1491-1556) 기념일            레위25,1.8-17 마태14,1-12

 

 

 

하느님 중심中心의 삶

-희년禧年의 영성-

 

 

 

끝은 시작입니다. 오늘은 7월의 끝날이자 예수회의 창립자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이요 내일은 8월의 첫날입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는 늘 새로운 시작의 ‘오늘’이 있을 뿐입니다.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이 성인들입니다. 참으로 신비롭게도 하느님은 그 시대에 맞는 성인을 보내 주십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성 이냐시오, 참 치열한 65세 인생을 사셨습니다. 성인 축일 때 마다 꼭 확인해보는 것이 성인의 생몰生沒연대에 제 나이와의 비교입니다. 더불어 많이 가톡 사진에 참 많이 담는 두 장면도 생각납니다. 아름다운 일출日出의 아침노을과 일몰日沒의 저녁노을 장면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파란만장한 삶에 46세에 사제서품을 받은 참 대기만성大器晩成의 인물이었습니다. 성인에 관한 내용 일부를 인용합니다.

 

“그의 생활은 극히 검소하고 엄격했다, 수면 시간은 3시간에 불과했으며, 많이 기도하고 고신극기하고 소박한 음식에 만족하며, 때로는 몇 개 구운 밤으로 식사를 때운 적도 있었다, 이처럼 자신에게는 엄격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매우 관대하며 온순하고, 사랑에 가득 찬 태도로 대했다. 

 

동지에게도 그러기를 권하고, 고행은 완덕에서 중요하지만 건강을 해칠 정도로 가혹하면 안된다고 훈계했다. 그리고 자신을 아끼지 않고 남의 행복을 위해 일해야 된다는 것을 늘 생각했다, 그의 개인생활 원칙인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Ad maiorem Dei gloriam)’는 예수회의 모토가 되었다.”

 

절대의 성인은 없습니다. 절대는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그러니 그 무엇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앞세워선 안됩니다. 상호보완의 상대적인 성인들입니다. 5세기 산山과 같은 성 베네딕도라면 12세기의 강江같은 성 프란치스코요, 16세기의 도시都市의 성인 성 이냐시오에 21세기 사막砂漠의 성인 샤를로 후코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구원 섭리가 오묘하기 한이 없습니다. 참 놀랍게도 하느님께서는 살아 있는 성인 같은 최초의 예수회 출신 프란치스코 교황을 코로나로 위기를 겪는 세상에 선물로 주셨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의 빛나는 모델이 바로 성인들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 분투奮鬪의 노력을 다할 때 영혼의 건강, 정신의 건강, 마음의 건강입니다. 영혼이, 정신이 하느님 중심의 자리에 있으면 육신은 저절로 영혼에 순종하기 마련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어제에 이어 레위기로 오늘로서 끝나고 다음 주엔 민수기가 이어집니다. 어제의 레위기가 ‘이스라엘의 축일들’을 소개했다면 오늘은 ‘희년’에 대한 소개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의 절정을 표현하는 희년이 영성이 참 멋집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4,19), 바로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시며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4,21), 하루하루 오늘 지금 여기서 희년의 영성을 사셨고, 우리 모두 희년의 영성을 살 것을 촉구하시는 주님이십니다. 

 

희년에 관한 법이 실제로 이스라엘에 적용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이 법은 어쨌든 삼중의 해방의 이상을 드러냅니다. 우리 땅에 사는 모든 주민에게 해방을 선포하는 ‘인간해방(human liberation)’, 저마다 소유지를 되찾는 ‘경제적 해방(economic liberation)’, 땅에게도 휴식을 주는 ‘생태적 해방(ecological liberation)’, 얼마나 멋진 삼중의 희년의 이상理想이자 영성靈性인지요! 주님은 오늘 레위기 마지막에서도 하느님 중심의 삶을 못박듯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너희 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레위25,17ㄴ)

 

기후변화와 코로나 팬데믹으로 위기를 겪는 작금의 세상에 회개를 촉구하는 희년의 이상이요 희년의 영성입니다. 진정 하느님 중심의 희년의 이상理想을 현실화現實化해갈 때 비로소 정의와 평화로운 세상이 될 것이며 인류 생존의 유일한 길이겠습니다. 참으로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로 살아야 할 절박한 오늘의 현실입니다.

 

오늘 복음도 ‘하느님 중심의 삶’이라는 렌즈로 보면 그 이해가 확연해 집니다. 나자렛에서 무시를 당하신 후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목격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헤로데 영주의 고백은 사실처럼 느껴집니다.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흡사 릴레이 경주시 바톤 텃치를 연상케 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뒤를 이어 요한의 몫까지 살아주시니 예수님을 통해서 요한이 부활한 것이지요.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보도에서 뚜렷이 대조되는 두 유형의 인간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하다 순교의 죽음을 맞이한 세례자 요한과, 하느님 중심 없이 살아가는 괴물같은 존재들인 헤로데와 헤로디아와 그의 딸 살로메입니다. 

 

사람이라고 다 똑같은 사람이 아님을 봅니다. 하느님 중심을 잃어버렸을 때 사람이 얼마나 악하고 잔인해질 수 있는지, 괴물같은, 악마같은, 폐인같은 존재로 전락할 수 있는지 역사의 교훈에서, 세상 곳곳에서 목격하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사람에 따라 천국도 되고 지옥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정말 사람보다 잔인하고 탐욕스런 존재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언젠가 어느 수녀님의 말도 생각납니다.

 

“사람 하나 만나고 싶다!”

 

토마스 머튼에 대한 평도 생각납니다. 머튼은 ‘카톨릭인이기 보다는 크리스찬이었고, 크리스천이라기보다는 종교인이었고, 종교인이기 보다는 사람이었다.’라는 평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항구히 분투의 노력을 다할 때 이런 참 사람이 되어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이겠습니다. 그러니 평생공부가 참사람되는 공부임을 깨닫습니다. 복음의 말미 묘사가 의미심장합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장사 지내고,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거기에서 배를 타시고 따로 외딴곳으로 물러가셨다.’(마태14,12-13)

 

요한의 죽음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셨음이 분명합니다. 이에 의기소침해진 소극적 반응의 도피가 아니라, 아버지와의 깊은 관상적 친교의 기도중에 영적 전의를 새로이 하며 하느님의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하셨을 예수님이십니다. 아마 세례자 요한의 순교의 죽음이후 예수님은 하루하루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사랑의 순교적 삶을 사셨을 것입니다. 순교는 성체와의 결합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희년의 영성을, 순교적 사랑의 삶을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하느님, 저희를 어여삐 여기소서,

 저희에게 복을 내리옵소서

 어지신 그 얼굴을 저희에게 비추소서.”(시편67,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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