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3.25.금요일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이사7,10-14;8,10ㄷ 히브10,4-10 루카1,26-38
믿는 이들의 영원한 모범이신 마리아 성모님
-우리 하나하나가 “임마누엘”이다-
오늘은 인류 역사의 획기적 전환점이 된 날입니다. 바로 그 주인공은 무명의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고을의 처녀 마리아입니다. 하느님과 마리아의 위대한 합작품같은 날입니다. 바로 주님 성탄에 앞서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 탄생이 예고된 참 복된 날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바 하느님의 겸손입니다. 하늘 높은 곳에서 참으로 눈 밝으신 하느님께서 결정적 순간에 몸소 당신 천사를 통해 나자렛 고을의 마을의 마리아를 찾으셨다는 것입니다. 제1독서 이사야서에서 보다시피 그 아득한 예전 이사야를 통한 주님의 예언이 성취되는 순간입니다.
“다윗 왕실은 들으십시오.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임마누엘, 얼마나 반갑고 고마운 이름인지요! 예수님만 아니라 잘 들여다 보면 우리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 믿는 이들 누구나의 참 자랑스러운 복된 신원입니다. 과연 임마누엘 답게, 하느님의 빛나는 현존으로 살고 있는지요!
문득 인도의 시성 타골의 “모든 아기의 탄생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표징이다”라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바로 임마누엘 예수님의 탄생 예고를 통해, 또 무수히 태어나는 또 하나의 임마누엘들을 통해 하느님의 인류에 거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아마도 오늘날의 비극이자 불행은, 절망의 표징은 날로 감소하는 출생률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하나의 생명의 탄생은 임마누엘의 탄생이요 모두가 하느님 구원의 표징, 희망의 표징이 됩니다. 바로 그 대표적 임마누엘이 오늘 탄생이 예고된 예수님이요, 예수님 덕분에 우리의 신원이 또 태어나는 모든 아이들 하나하나가 임마누엘임을 깨닫게 됩니다. 부활 승천하실 때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을 통해서도 확인되는 임마누엘 우리의 신원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ㄴ)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이신 임마누엘 예수님이라는 확약 말씀입니다. 이미 예수님 탄생 이전부터 마리아 역시 임마누엘이었음이 마리아를 방문한 주님의 천사 가브리엘의 첫인사를 통해 환히 드러납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이 말씀은 제가 면담 고백 성사시 가장 많이 보속으로 써드리는 말씀 처방전중 하나입니다. 언젠가 보속으로 이 말씀을 써드렸을 때, “아 이 말씀은 보속補贖이 아니라 살아 있는 보석寶石입니다.”라는 어느 수녀의 탄성을 잊지 못합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처럼, 오늘의 주인공 마리아 성모님처럼 은총을 가득히 받은 임마누엘로 살 수 있을까요?
첫째, 정주定住의 삶입니다.
참으로 정주의 사람이 임마누엘입니다. 그 빛나는 모범이 오늘 복음의 마리아입니다. 하느님이 계신 곳을 찾지 말고 하느님을 찾으라는 사막교부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늘 거기 그 자리에서 언제 어디에나 계신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이가 정주의 사람이요 그 모범이 마리아입니다. 그러니 조금도 자리 탓할 것 없습니다.
장소가 아닌 사람이 문제입니다. 성지가 있어 성인이 아니라 성인이 있어 성지입니다. 장소가 좋아 명당이 아니라 참으로 좋은 사람이 머물면 거기가 명당입니다. 모 정치인은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했는데 하느님과 함께 정주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의식이 공간을 지배합니다’. 아무리 터가 세도 하느님의 힘으로 이를 압도합니다.
참으로 마리아처럼 늘 거기 나자렛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책임을 다하며 정주의 삶에 충실했기에 그 하늘 높은 곳에서도 눈밝은 하느님은 이를 아시고 당신의 도구로 쓰시고자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방문하십니다. 얼마전 인용했던 "자리 탓하지 말자”는 자작 애송시도 다시 나누고 싶습니다.
“자리 탓하지 말자
그 어디든 뿌리 내리면
거기가 자리다
하늘님만 볼 수 있으면 된다
회색빛 죽음의 벽돌들
그 좁은 틈바구니
집요히 뿌리 내린
연보랏빛 제비꽃들!
눈물겹도록 고맙고 놀랍다
죽음보다 강한 생명이구나
사랑이구나
절망은 없다”-2001.4.18
둘째, 기도祈禱의 삶입니다.
참으로 기도의 사람이 임마누엘입니다. 역시 그 빛나는 모범이 마리아입니다. 마리아야 말로 관상기도의 대가, 렉시오 디비나의 대가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사랑과 생명의 소통인 대화를 의미합니다. 이런 한결같은 기도를 통해 주님과 깊어지는 신뢰와 사랑의 관계입니다.
참으로 고결하고 위대한 영혼은 마음에 담아두고 새기는 능력에 있다 합니다. 가브리엘 천사의 축복 인사를 들었을 때 몹시 놀란 마리아였지만 곧 마음을 수습해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마음에 담고 곰곰이 생각하는 모습에서 마리아의 관상적 면모가 잘 드러납니다. 이어지는 마리아에 대한 주님의 천사의 일방적 말씀을 통해 하느님의 속내가 환히 드러납니다.
얼마나 마리아를 신뢰하고 사랑하는 주님이신지 마리아는 참으로 감격, 감동, 감사했을 것입니다. 참행복은 이렇게 주님께 신뢰와 사랑을 받고 있을 때일 것이니 도대체 세상 무엇이 부럽겠는지요!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릴 것이다.”
참으로 침착한 관상가, 마리아의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에 대한 주님의 천사 가브리엘의 자상한 설명입니다. 하느님의 전폭적 신뢰를 한몸에 받고 있는 참 복된 성 마리아입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난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 불릴 것이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란 없다.”
얼마나 하느님과 깊은 신뢰 관계에 있는 관상기도의 대가, 마리아인지 확연히 드러납니다. 이런 주님께 대한 한없이 깊은 사랑과 신뢰는 마지막 말씀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셋째, 순종順從의 삶입니다.
참으로 순종의 사람이 임마누엘입니다. 자발적 사랑의 순종입니다. 어찌보면 믿는 이들의 여정은 순종의 여정입니다. 산다는 것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순종이요 참 영성의 잣대 역시 순종입니다. 일상의 작고 큰 순종에 한결같을 때 마지막 순종의 죽음도 잘 맞이할 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 응답이 나오기전 온 산천초목이 초긴장 상태의 정적에 싸여 있었다는 아오스팅 성인의 주석도 생각납니다. 하느님께서도 마리아의 응답이 없이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마리아가 순종으로 응답함으로 구원역사가 차질없이 펼쳐지게 되었으니 하느님은 얼마나 감격스럽고 고마웠겠는지요!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천사는 그대로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합니다. 참으로 겸손하신 하느님께서 중대한 사명을 마치시고 홀가분하게 떠나는 뒷모습이 참 아름답고 기분이 좋습니다.
문득 떠오르는 어느 평신도 신학자의 “마리아는 하느님께 대한 인류의 자부심이다.”라는 말입니다. 하느님께 자랑스러이 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참사람이 마리아라는 것입니다. 저절로 ‘하느님 그대 마리아의 자랑이듯이, 마리아 그대 하느님의 자랑이어라’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부전자전父傳子傳이란 말도 있지만 모전자전母傳子傳이라는 말이 마리아에게는 더 잘 어울립니다. 마리아 성모님의 순종을 그대로 보고 배운 예수님의 시편(40,7-9)을 통한 고백이 히브리서에서 연거푸 두 번이나 나옵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바로 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깨닫는 진리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임마누엘 예수님과 성모님을 그대로 닮은 우리 고유의 신원, 임마누엘로 살게 하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