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4.19.부활 제2주간 수요일 사도5,17-26 요한3,16-21
행복의 선택, 선택의 은총
-“사람이 물음이라면 예수님은 궁극의 답이다”-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내 입에 늘 찬양이 있으리라.
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이 넘치고,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시편34,2.6)
참 좋은 화답송 시편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에 대한 영문주석이 깊은 여운으로 남아있습니다. 그 부분을 소개합니다.
“사도행전 이야기는 사도들과 유다 지도자들간에 점증하는 긴장으로부터 ‘우스꽝스런 구원(comic relief)’을 마련해 준다. 천사가 그들의 죄수들을 풀어줌으로 야기된 산헤드린 최고의회의 당황함은 참으로 ‘익살맞다(funny)’. 그것은 신적神的 경솔함(divine levity)의 섬광閃光이다. 누군가 알아채고 한말이다. ‘사탄이 추락한 것은 진지함 때문이다.’ 오늘 두 독서의 가르침은 ‘가볍게 하라!(lighten up!)’처럼 보인다”
심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심각함, 엄중함, 진지함은 참영성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유머처럼 생각하고 마음을 가볍게, 밝게 지니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쾌하게, 유쾌하게, 상쾌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이와 관계되어 읽은 글도 생각납니다.
“심각함은 덕이 아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악덕이다. 엄숙함은 사람들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그러나 웃음은 도약이다. 무거워지기는 쉽고, 가벼워지기는 힘들다. 사탄은 엄숙함의 힘에 의해 추락했다. 천사들은 자신을 가볍게 함으로 날 수가 있었다.”
선택이 답입니다. 선택의 은총입니다. 이왕이면 행복을, 사탄이 아닌 천사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어제의 선택이 저를 참으로 행복하게 했습니다. 우연히가 아닌 은총의 선택입니다. 뜻밖에 유덕현 야고보 아빠스의 사순특강을 동영상으로 감명깊게 공감하며 재미있게 보고 들은후 원장수사에게 휴대폰을 알아 아빠스와 주고 받은 내용입니다. 아래 두 경우 저의 탁월한 선택이었고 이 또한 선택의 은총임을 절감했습니다.
“뜻밖에 유투브에서 아빠스님의 사순특강 재미있게 감명깊게 보고 들었습니다. 정말 준비하시노라 수고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부활 축복 가득 받으세요!”
“신부님의 격려말씀 너무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셔서 좋은 말씀 많이 들려주세요.”
주고받은 선택의 격려의 덕담이 참으로 저를 행복하게 했고, 즉시 원장수사를 불러 차 한잔 하며 이 기쁨을 나누었으니 실로 몇 달만에 은총의 선물같은 만남이었습니다. 또 재활병원에 입원중인 분이 보내준 사진이 너무 환상적인 아름다움이라 주고 받은 메시지를 나누고 싶습니다.
“혼자 병실에 있었더니 직원 간호사님이 옥상 여행 시켜주었습니다. 꽃구경 봄바람 구경했나이다.”
“사진이 너무 멋지고 아름다워 환상적입니다. 두분이 정말 하늘에서 하강한 선녀들같기도 하고 천사들같기도 합니다. 감사드리고 축하드립니다. 간호사님께 고맙다는 인사 전해 주세요.”
“네 신부님, 감사하옵니다.”
주고 받은 선택의 격려의 덕담에 참 행복했고 긴 여운의 향기로 남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참 좋으신 분을 선택할 것을 간곡히 권하는 느낌입니다. 복음 서두 말씀이 참 인상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3,16)
이와 연상되어 떠오르는 구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요한13,1)
부전자전, 그 아버지에 그 아드님입니다. 하느님이 세상에 주신 최고의 선물이 예수님입니다. 세상을 너무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셨는데, 그 아드님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실 때가 되자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새삼 두분에게는 사랑이 답이요 모두임을 깨닫습니다.
구원도 심판도, 행복도 불행도 선택입니다. 선택의 은총입니다. 어리석어 무지로 인해 이 좋은 선택을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이요 빛이요 영원한 생명이요 진리입니다. 이런 예수님이 어둠의 세상에 주어졌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지요! 인류의 빛이신 예수님이 계시지 않다면 사람이 무지와 허무의 어둠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런지요! 어디서 희망과 기쁨을 찾을 수 있을런지요. 제가 조선 선비들의 평전을 읽으며 결정적인 아쉬움은 초월적 희망과 기쁨이, 파스카의 희망과 기쁨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치명적 결함입니다.
그러니 빛이요 생명이요 진리요 구원이요 희망이요 기쁨이요 행복이신 예수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예수님을 새롭게 선택하여 사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지혜로운 선택은 없습니다. 무거워지기는 쉬워도 가벼워지기는 힘듭니다. 사탄이 추락한 것은 무거움 때문이요 천사가 날 수 있는 것은 부단히 자기를 비워 가볍게 했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파스카 예수님을 선택할 때 날로 가벼워져 천사처럼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최고의 탁월한 선택은 빛이자 생명이자 진리이자 행복이신 파스카 예수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의 탁월한 모범은 사도행전의 사도들입니다. 결코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음을 봅니다. 주님의 천사가 개입하여 수인들이 된 사도들을 풀어줌으로 최고의회를 웃음거리로 만듭니다. 마치 빛이신 하느님과 어둠의 세력간의 싸움같습니다. 다음 두 구절이 사도들의 완전 승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선택했을 때의 사필귀정의 결론입니다.
“가거라.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모두 백성에게 전하여라.”
새삼 세상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생명의 말씀을 가둘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보고가 점입가경입니다.
“여러분께서 감옥에 가두신 그 사람들이 지금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선택의 은총입니다. 사람이 물음이라면 예수님은 궁극의 답입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예수님뿐입니다. 무엇보다 주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빛이자 생명이자 진리이자 생명의 말씀이자 행복인 주님을 날마다 선택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고백하고 그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그분께 몸을 숨기는 사람!”(시편34,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