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8.30.연중 제21주간 수요일 1테살2,9-13 마태23,27-32
회개의 여정
-선택, 훈련, 습관-
“주님, 당신은 저를 살펴보시고 잘 아시나이다.
당신 숨결을 피해 어디로 가리이까?
당신 얼굴을 피해 어디로 달아나리이까?
하늘로 올라가도 거기 당신이 계시고,
저승에 누워도 거기 또한 계시나이다.”(시편139;1.7-8)
엊저녁의 밤은 공기도 아주 청정하여 상쾌했고 어둠을 가로질러 나르는 세 마리의 반딧불 빛이 참 반갑고 신기했습니다. 청정지역에 밧딧불이라는데 수도원 정원이 그런가 봅니다. 형설지공(螢雪之功), 반디불빛과 눈빛 아래서 공부에 전념했다는 옛 선비의 전설같은 아름다운 일화도 생각났습니다. 어둔 세상을 밝히는 반딧불같은 강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밤 1시 기상후 집무실을 향할 때 역시 상쾌했습니다. 침실문밖을 나서면 늘 맨먼저 보는 하늘과 불암산입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요셉 수도원 만세!”
나라가 있고 종교도 있습니다. 집무실 십자고상 바로 아래 붙인 태극기를 보며 성호경과 영광송 기도후 만세오창후 시작하는 하루입니다. 8년간 교편생활후 34세 늦깍기로 수도원에 입회후 만41년, 40세에 요셉 수도원에 부임하여 정주의 산이되어 산지 만35년 작금의 나이 75세, 참 쏜살같이 흐르는 세월입니다. 이제부터 산날 보다는 남은 날을 헤아려야하는 나이가 됐습니다.
이런 일이 있으리라곤 꿈에도 상상치 못했습니다. 역사의 반동도 퇴행도 도저히 이럴 수는 없습니다. 십자고상 아래 태극기를 부착하는 것은, 피정자 모임시 퇴장 성가를 애국가로, 또 강론시 애국가를 불러 보기는 사상 초유의 일로 상상도 못했던 일입니다. 그정도로 현재의 상황이 공분을 불러 올 정도로 엄중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저절로 애국하는 마음, 독립운동하는 마음으로 깨어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회개하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늘 나라의 선포에 앞서 필히 선행되어야할 회개입니다. 신자생활의 기초가 바로 하느님께 돌아서 제자리로 돌아가는 회개입니다. 한 두 번의 회개가 아니라 기도처럼, 늘 끊임없는 기도와 함께 가야할 끊임없는 회개입니다. 그러니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회개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도 하느님께 돌아가는 회개뿐임을 깨닫습니다. 영적 삶 역시, 회개의 메타노이아, 친교의 코이노니아, 봉사의 디아코니아 순서입니다. 그러니 자발적 선택의 회개의 은총은 얼마나 고마운지요!
하느님께 돌아가는 회개와 더불어 사랑의 회복이요, 이어 자기를 아는 겸손에 지혜입니다. 도대체 회개 없는 겸손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2차대전이후 처절한 회개와 반성으로 새로 난 독일과는 달리 같은 전범국가로서 일본은 회개가 전무한 나라입니다. 회개하지 않은 역사는 또 반복될 수 있습니다. 철저한 회개만이 악순환의 역사를 끊을 수 있습니다. 이래서 한시도 경계를 늦춰서는 안됩니다.
고려시대이후 끊임없는 왜구의 침략으로 얼마나 고단한 한반도 민초들의 삶이었는지 역사가 증명합니다. 7년 동안의 임진왜란으로 전국토는 초토화 되었고, 35년 간의 일제의 강점기 식민지 시대로 나라 잃은 세월을 보내다가 하느님과 연합국들, 순국 선열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세계 2차 대전후 광복을 맞이한 한반도 땅이 아닙니까? 다시 불행의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은 단호히 막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흘린 피만으로도 차고 넘칩니다. 며칠전 유명 정치평론가의 결론같은 언급도 생각납니다.
“문제는 우발적 충돌과 확전이다. 대통령은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모든 정책의 중심에 놓아야 한다. 그래서 이길 수 있더라도 전쟁은 기필코 피하고 예방 외교를 적극적으로 펼쳐야 한다. 평화와 안보에는 신중과 겸손이 최대의 미덕이다.”
너무 지당하고 합당한 생각입니다. 오늘 말씀도 회개의 관점에서 보면 그 이해가 확연해 집니다. 회개를 통해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단호히 배격하는 선택이요 제1독서의 바오로 일행과 테살로니카 교회 신도들의 순수한 믿음과 사랑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불행 선언은 저주라기 보다는 회개를 촉구하는 간곡한 호소입니다. 오늘은 7개의 불행 선언중 마지막 둘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같기 때문이다. 겉은 의인처럼 보이나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져하여라.”
그대로 오늘 종교인들의 민낯을 보는 듯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동시에 예언자들을 박해하는 자가당착의 모순된 위선적 삶을 정확히 지적하는 예수님입니다. 매국을 꾸짖으면서 온갖 합리화와 강변으로 매국 행위를 공공연히 하는 친일의 정치가들이나 식민사관에 중독된 이들도 꽤 많은 작금의 현실입니다.
예나 이제나 이런 위선적 부정적 요소는 인간의 보편적 현상입니다. 정말 깨어 회개의 삶을 통해 좋은 삶을 선택, 훈련, 습관화 하지 않으면 위선적 거짓 삶의 악순환의 질곡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이런 부정적 교회 지도자들과 신도들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바오로 일행과 테살로니까 교회의 신도들입니다.
참으로 복음적 교회의 원형을 보는 듯 회개와 더불어 이런 삶을 자발적으로 선택하고 훈련하여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습니다. 바오로 일행의 순수하고 진실하고 겸손한 삶의 모습을 보고 배웠음이 분명한 테살로니카 교회 신도들입니다. 얼마나 순수하고 아름다운 바오로 일행과 데살로니카 신도들의 삶인지 다음 바오로의 고백이 그대로 마음에 감동으로 와닿습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경건하고 의롭게 또 흠잡힐데 없이 처신하였는지, 여러분이 증인이고 하느님께서도 증인이십니다. 또한 우리는 끊임없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이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신자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를 통한 하느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이 아닌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때 오늘 강론을 통한 말씀은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면서 여러분을 정화하고 성화하며 또 위로와 치유도 선사할 것이니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기도 합니다. 또 주님의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회개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님, 제가 새벽놀의 날개 달아,
바다 끝에 자리 잡아도,
거기서도 당신 손이 저를 이끄시고,
당신 오른 손이 저를 붙드시나이다.”(시편139,9-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