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9.4.연중 제22주간 월요일 1테살4,13-18 루카4,16-30
자유의 여정
-만남, 회개, 자유-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내 영혼, 하느님을 그리나이다
내 영혼, 하느님을, 생명의 하느님을
애타게 그리건만 그 하느님 얼굴을 언제나 가서 뵈오리까"(시편42,2-3)
아침 성무일도 시작 시편이 마음을 울립니다. 불철주야(不撤晝夜), 온 힘을 다해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사람, 복음의 일꾼, 현재 몽골을 사목 방문중인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신자들의 믿음은 사랑의 갈망에 대한 답이다.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목마름을 해갈시킬 수 있다.” 어제 몽골에서의 주일미사시 강론 주제입니다.
“교황, 중국 가톨릭인들에게 좋은 시민이 될 것을 촉구하다.”
“몽골에서 ‘더불어 평화를 위한’ 기도”
“종교들이 대화, 조화, 희망을 육성(育成)하게 하소서.”
“여러분들은 내 마음 안에 있습니다.”
교황님에 관한 기사로 가득한 교황청 홈페이지 중요 뉴스 제목 하나하가 참 좋은 묵상감입니다. 몽골에 희망의 순례자로 여정중인 교황이 참 자유롭고 평화롭고 행복해 보입니다. 말그대로 예수님처럼 희망의 순례자, 우애의 순례자로 자유의 여정중인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아주 오래전 21년전 “욕심없으면 어디나 천국”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수도형제 엘리야 수사의 모친 레나타 자매가 좋아했던 시이기도 합니다.
“수도원 정문옆 수녀원 담장안
쓸모없는 땅이라 관심도 없다
욕심없으면 어디나 천국 참 넉넉한 자리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음이 행복이구나
볼품이 뭐 대수랴
너와 나 편안하면 그만 아닌가
내 맘껏 가지들 뻗어 하늘 자유 맘껏 누리니 만족이다
열매 탐내는 나무 아님이 천만다행이구나
하늘 나는 새들의 쉼터 됨이 기쁨이다
흐르는 구름, 은은한 별빛, 부드러운 미풍 가슴 떨리는 감동이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나를 끌어낼 수 없다
내 이름은 참나무”-2001.3.23.
전지와 전정으로 꼴 잡혀진 분재(盆栽)처럼 열매를 목적으로한 배나무들과는 머무나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참나무입니다. 내적자유의 상징같은 그 참나무는 지금도 울창한 거목으로 여전합니다. 자유에 대한 갈망은 그대로 하느님께 대한 갈망과 통합니다.
참으로 자유자체이신 하느님께 파견 받은 주님의 종, 대 자유인 예수님입니다. 갈릴래아 전도와 더불어 공생애가 펼쳐지기전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시는 주님의 모습이 참 장엄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바로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이웃을 위한 주님의 섬김의 종, 대 자유인 예수님이신지요! 예수님의 평생 사명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아, 이런 예수님만이 인간 무지와 허무, 자유에 대한 근본적 처방이자 답입니다. 참으로 이런 주님을 만날 때 회개의 은총과 더불어 무지로부터의 해방과 더불어 자유입니다. 한두번 만남이 아니라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죽을 때까지 새롭게 만나야 날로 깊어지는 자유의 여정입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졌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에게 주어진 해방과 자유의 은총이 참으로 자유로운 해방의 기쁨을 살게 합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예수님 고향 나자렛 사람들은 무지의 불신으로 제대로 응답하지 못했습니다. 이 또한 우리에겐 반면교사가 됩니다. 공생애 시작부터 좌절을 안겨주는 고향 사람들, 이 또한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한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예수님의 고향인들을 향한 깊은 좌절과 환멸을 감지하게 됩니다. 주님은 이어 엘리야 시대의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와 엘리사 시대의 시리아 사람 나만, 즉 이교인들의 겸손한 믿음의 사례를 들면서 고향인들의 회개를 촉구하지만 마이동풍입니다. 참으로 회개가 절실한 편견의 무지에 눈먼 고향인들입니다. 이런 장면 모두가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회개의 표지들입니다.
이들의 무지의 분노가 점입가경, 마침내 주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합니다. 마지막 이들을 유유히, 표표히, 홀가분하게 이들을 정면돌파하여 홀연히 떠나 당신의 길을 계속 가시는 대 자유인 예수님의 다음 장면은 얼마나 멋진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예수님의 이 자유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주님의 종으로서 파견받은 자의 파견의식입니다. 결코 우연한 허무한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께 파견받은 존재요 언젠가는 돌아갈 하느님께 대한 희망이 바로 샘솟는 열정의 근원이었음을 봅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 똑같습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불림 받은 성소자임과 동시에 파견받은 소중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를 깨달아 확신이 날로 깊어갈 때 정체성 또렷한 하느님 중심의 삶이겠습니다. 이를 깨닫지 못해 표류하고 방황하는 천박한 삶입니다. 이래서 세상 것들에 중독되어 폐인도 괴물도 되고 일상의 무기력과 허무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파견받은 자로서 각자 삶의 자리에서 자유와 희망의 내적 여정을 살아갑니다. 돌아가시고 부활하시어 늘 함께 계시는 초월과 내재의 파스카 예수님이 우리의 궁극의 희망이 되고 영원한 도반이, 지칠줄 모르는 열정의 샘이 됩니다. 바로 제1독서 바오로가 전해 주는 주님의 재림을 통해 파스카 주님이 우리의 희망임을 새롭게 확인하게 됩니다.
“죽은 이들의 문제에 대해, 여러분은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음을 우리는 믿습니다...우리 산 이들이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들려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말로 서로 격려하십시오.”
바오로가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주님을 향한 자유의 여정, 희망의 여정이요 우리를 맞이하게 위해 마중나오는 천상의 주님이 바로 우리 모두 지칠줄 모르는 열정의 삶을 살게 합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희망의 여정, 자유의 여정에 항구하게 합니다. 끝으로 예전에 영원한 자유인을 꿈꾸며 썼던 제 좋아하는 또 하나의 자작 애송시를 나눕니다.
-“나 이런 이를 알고 있다
밤하늘의 초롱초롱한
별빛 영혼으로 사는 이,
푸른 하늘 흰구름이 되어
임의 품안에 노니는 이,
떠오르는 태양, 황홀한 사랑
동녘 향해 마냥 걷다가 사라진 이,
첫눈 내린 하얀길 마냥 걷다 사라져
하얀 그리움이 된 이,
나 이런 이를 알고 있다.”-1999.2.2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