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선택이다!” -판단의 잣대는 사랑, 사랑밖엔 길이 없다-2021.10.29.연중 제30주간 금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Oct 29,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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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29.연중 제30주간 금요일                                                               로마9,1-5 루카14,1-6

 

 

 

“사랑은 선택이다!”

-판단의 잣대는 사랑, 사랑밖엔 길이 없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에 대한 정의는 이것 하나뿐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요 판단의 잣대는 사랑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네’, 10년전 출간된 제 졸저의 책명이지만 누구나 공감하는 말마디입니다. 여기에 저는 한 진리를 깨달음처럼 발견했습니다.

 

“사랑은 선택이다!”

 

생각해보면 선택의 여지가 없이 타고난 것이 너무 많습니다. 애당초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내탓이라 할 수 없는 타고난 것들입니다. 어느 분은 ‘원판불변의 법칙’이라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도 합니다. 변질이 아니라 본질이 드러난 것이라고 합니다.

 

나라도, 부모도, 가정도, 형제도, 건강도, 얼굴도, 재능도, 성격도, 기질도, 탄생도, 죽음도 타고납니다. 선택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는 집안의 내력처럼 타고나는 병도 많습니다. 그러니 노력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선택할 수 없는 타고난 것들만 생각하면 절망, 원망, 실망의 삼망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면, 날마다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무궁무진합니다. 잘 선택하여 실천할 수 있는 지혜와 열정, 용기의 은총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선택할수 있는 것들에 대하여 책임을 묻거나 심판하실뿐, 심판의 여지가 없는, 심판할 수 없는 타고난 것들에 대하여는 결코 책임을 묻지도 심판하지도 않습니다.

 

무엇을 선택합니까? 사랑을, 믿음을, 희망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선을, 아름다움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어둠이 아닌 빛을, 죽음이 아닌 생명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온유와 겸손을, 찬미와 감사를, 행복과 평화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천국도 지옥도 선택일 수 있습니다. 순교가 그토록 위대한 것은 주님 진리에 대한 사랑을 위해 죽음을 선택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한마디로 끊임없는 의지적 결단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구원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주님은 올바른 선택의 노력에 항구한 이들을 도와 주십니다. 주님을 선택하여 날마다 다음같은 고백의 기도를 바치는 것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희의 전부이옵니다.

저희 사랑, 저희 생명, 저희 희망, 저희 기쁨, 저희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원망, 절망, 실망의 삼망이 아닌 감사, 감동, 감탄의 삼감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선택한 믿음의 사람들은 절대로 절망하거나 원망하거나 실망하는 일이 없습니다. 제1독서 로마서의 바오로의 진솔한 고백이 감동적입니다. 얼마나 주님과 깊은 일치의 사랑을 살고 있는 바오로 사도인지 깨닫습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을 말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커다란 슬픔과 끊임없는 아픔이 내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육으로는 내 혈족인 동포들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라도 했으면 하는 심정입니다.”

 

바로 바오로의 ‘커다란 슬픔과 끊임없는 아픔’은 하느님의 가이없는 연민의 사랑을 뜻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느님 찬미의 사랑으로 끝맺은 바오로입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계시는 하느님으로서 영원히 찬미받으실 분이십니다. 아멘.” 

 

우리 하느님은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하느님이십니다. 이런 하느님을 닮으면 하나의 인격으로서 존경은 못해도 존중과 연민의 아가페 사랑을 선택하여 할 수 있습니다. 깊이 들여다보면 누구나 예외없이 약하고, 죄짓고, 병들고,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이기에 저절로 인간 누구나에 대한 연민과 존중의 아가페 사랑을 느낄 것입니다. 

 

동족을 위해서라만 지옥의 선택도 마다 않겠다는 바오로의 고백을 통해 사도의 한량없는 깊이의 사랑을 느낍니다. 흡사 불교의 지장보살을 연상케 합니다. 지장보살은 누구입니까? 지옥의 고통을 받으며 괴로워하는 중생들 모두가 빠짐없이 성불成佛하기 전에는 자신도 지옥에 머물러 결코 성불하지 않을 것을 맹세한 보살이 바로 지장보살입니다. 동방수도영성에 나오는 글 일부를 소개합니다.

 

“성 그레고리오에게 지옥은 영혼의 치유 상태로 이해된다. 그것은 하느님의 절대적인 선과 사랑의 확신에 기초한다. 지옥의 고통은 그의 유일한 목적으로서 영혼의 치유에 있다. 고통은 영원하지 않음을 뜻한다.”

 

이래서 자모慈母이신 교회는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며 착한 신자들은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끊임없이 연미사를 봉헌합니다. 계속 이어지는 의미심장한 내용들입니다.

 

“치유는 불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그 불은 감각적 불이 아니라 도덕적 성격의 불이다. 정화후에 영혼들은 영원으로 들어간다. 어떤 이들은 지상생활동안 정화에 도달하고 어떤 이들은 내세동안 성취한다. 정화와 부활후 인간은 하느님께 돌아갈 것이다. 그것은 천사적 상태로 돌아가려는 영혼의 갈망 때문이요 하느님의 선이 이것을 가능하게, 필수적이 되게 한다. 

 

마지막으로 ‘악의 발명자(the inventor of evil)’까지 비슷한 방법으로 치유될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원래의 상태로 회복될 때, 온 창조계에 울려 퍼지는 찬미는 하느님께로 들어 높여질 것이다.” 

 

고대 교부들의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영적시야가 참 매력적이고 공감이 갑니다. 이분들에게 영원한 지옥의 개념은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살아서도 이미 때로 지옥불의 정화를 체험하는 우리들입니다. 회개의 불로 마음이 극도의 고통과 아픔을 겪으며 정화될 때 그대로 지옥의 체험이요, 바로 이런 지옥같은 체험 역시 자비로운 하느님 안에서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떠났지 자비하신 하느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에 의지하여 감히 말하건데 지옥의 영혼들이 다 구원되어 지옥이 텅비워질 때 까지 천국문은 계속 열려있을 것입니다. 이래서 교회의 죽은이들을 위한 기도가 참으로 절실히 필요하고 고마운 것입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입니다. 판단의 잣대는 사랑이요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사랑은 선택입니다. 이런 사랑에 정통한, 하느님 자비의 화신인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 분별의 잣대는 율법이 아닌 사랑이었습니다. 모든 율법을 상대화하는 절대적 사랑의 법입니다. 사람이, 사랑이 먼저입니다. 

 

이웃에 대해 참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은 결코 잘못될 수 없습니다. 참으로 사랑의 행위는 죄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과 죄는 양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수종을 앓는 이를 치유하신 것은 너무 자연스럽고 당연한 자비행인 것입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

 

율법주의에 눈이 가린 무지한 탓이지, 사실 예수님의 사랑의 처신은 지극히 온당하고 상식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을 잡고 병을 고쳐서 돌려보내셨고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은 아무 대답도 못합니다. 이미 질문안에 답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분별의 잣대는 사랑이요, 구체적으로 “예수님같으면 어떻게 하셨을까?” 예수님을 분별의 잣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분별의 지혜와 사랑을 선물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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