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7.22.토요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아가3,1-4ㄴ 요한20,1-2.11-18
누구를 찾느냐?
-찾아라, 만나라, 전하라-
"향기론 막달라의 고운꽃이여
예수의 사랑으로 도취된이여
당신의 타오르는 사랑으로써
우리의 마음들을 달궈주소서."
오늘은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아침성무일도 찬미가가 참 아름답습니다. 사도들 말고 축일을 지내는 유일한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입니다. 그 누구보다 주님을 사랑했고 또 주님의 사랑을 받았던 성녀였습니다. 사도들이 다 도주했을 때 주님의 어머니와 요한과 함께 십자가 예수님의 발치에 있던 성녀였었고 무덤에서 맨먼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성녀였습니다.
성녀의 주님 사랑이 얼마나 탁월했는지 보여 주는 생생한 증거입니다. 그래서 비잔틴 전례는 예수님께서 성녀를 “사도들의 사도”로 만들었다고 고백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녀와 예수님의 만남이 그림처럼 묘사되고 있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주님을 찾습니다. 어제 써놓고 나눴던 시화詩畫가 생각납니다.
-“바다가
하느님이 그리울 때
보고 싶을 때
바다를
하느님을 바라보듯
하늘을
끝없이 펼쳐진 깊고 푸른 하늘을
바라본다
바다가
하느님이 그리울 때
보고 싶을 때”-
하느님을, 바다를 바라보듯 참 많이 바라보는 하늘입니다. 아마 저만큼 하늘과 산을 많이 바라 본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하루에도 수없이, 35년 동안 수도원에 정주하면서 참 많이 바라본 하늘과 불암산이요, 그대로 하느님을 찾는 마음의 표현이겠습니다. 요즘은 많은 비가 내린후라 흐르는 불암산 계곡물이 좋아 자주 시냇가를 산책하다 역시 어제 써놓은 글을 나눕니다.
“하늘비
내려야
맑게 흐르는 시냇물인가
하늘 비
없어도
늘 깨어 끊임없이 찬미 노래부르며
맑게 흐르는
주님의 시냇물이고 싶다”
주님을 참으로 사랑했던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의 마음이 바로 이러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녀와 주님과의 만남에서 귀한 진리를 배웁니다. 바로 찾음, 만남, 선포의 세 과정입니다.
첫째, 찾아라!
주님을 찾으십시오. 수도자를 일컬어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라 합니다. 하느님을 찾는 열정이 사라지면 영성생활도 끝입니다. 살아있다 하나 실상 죽어있는 삶입니다. 내적 삶도 서서히 부패하기 시작합니다. 참으로 눈물겹도록 주님을 사랑하고 찾았던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였습니다. 주님의 성녀에 대한 “누구를 찾느냐?”물음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물음입니다. 과연 주님을 찾는다고 고백할 수 있겠는지요.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주님을 찾기 마련입니다. 주님을 끊임없이 깨어 찾을 때 비로소 살아 있다 할 수 있습니다. 다음 화답송 시편도 주님을 찾는 이들의 마음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하느님, 당신은 저의 하느님, 저는 새벽부터 당신을 찾나이다. 제 영혼 당신을 목말라하나이다. 물기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에서 이 몸은 당신을 애타게 그리나이다...이렇듯 제 한평생 당신을 찬미하고, 당신 이름 부르며 두 손 높이 올리나이다.”
주님을 사랑하여 끊임없이 깨어 맑게 찬미노래 부르며 흐르는 주님의 시냇물처럼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시편 공동전례기도를 바치며 주님을 찾는 여기 수도자들입니다.
둘째, 만나라!
주님을 찾을 때 만납니다. 주님을 만날 때 참 나의 발견입니다. 주님을 찾는 사람이요 사람을 찾는 주님입니다. 주님을 찾지 않으면 주님을 결코 찾지 못합니다. 참으로 간절히, 절박하게 주님을 찾을 때 비로소 주님과 만남의 은총입니다. 만남중의 만남이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전례가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도 살아 있는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만남의 기쁨, 만남의 축복입니다. 바로 이 주님과 만남의 기쁨으로, 맛으로 살아가는 수도자들이요 믿는 이들입니다. 이런 주님과의 만남이 없다면 광야인생 무슨 기쁨, 무슨 맛으로 살아낼런지요. 오늘 제1독서 아가서도 사랑하는 주님과의 만남을 상징적으로 표현합니다.
“나는 잠자리에서 밤새도록,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아다녔네...성읍을 돌아다니는 야경꾼들이 나를 보았네. ‘내가 사랑하는 이를 보셨나요?’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았네.”
오늘 성녀와 예수님과 만남의 대목도 감동적입니다. 역시 주님과의 만남은 은총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주님께서 만나주시지 않으면 만날 수 없습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가겠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성녀의 지극한 사랑에 감격하신 주님은 착한 목자처럼, “마리아야!”하고 부르시자,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하고 부릅니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입니다. 아, 성녀는 평생 이 만남을 잊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런 아름다운 주님과의 살아 있는 사랑의 만남의 추억이 성녀에게는 평생 삶의 원동력이 되었을 것입니다. 한두번이 아니라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찾고 만나야 하는 주님입니다. 이래야 광야인생 괴물이나 폐인이 아닌 주님을 닮은 성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셋째, 전하라!
물도 고이면 썩습니다. 부패합니다. 끊임없이 흘러야 맑은 물이듯 관상의 행복, 만남의 행복도 끊임없이 나눠야 부패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성녀에게 자기를 붙들지 말고 내 형제들에게 가서 당신의 승천을 전하라 하십니다. 이제 지상의 주님은 부활 승천하심으로 명실공히 초월과 내재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하느님 오른쪽에 좌정하시면서 동시에 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이 되셨습니다. 우리를 내 형제들이라 말씀하심이 참 고맙습니다. 모두가 한 아버지의 자녀들이요 예수님을 맏형으로 모신 주님의 형제들의 가족공동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요즘 저희 수도공동체가 그 좋은 증거입니다. 어제 식탁을 봤더니 18명중 6명이 잠시 한 식구로 수도공동체에 거주중인 손님들이었습니다. 1/3이 손님으로 이뤄진 주님의 가족이니 참 놀라운 기적입니다. 명실공히 환대의 집, 수도원이 되었습니다. 주님과 관상의 만남은 형제들에 대한 개방의 선포로 이어져야 합니다. 복음 말미에서 보는 바처럼, 성녀가 그 좋은 모범입니다. 성녀가 주님의 제자공동체와 얼마나 깊이 결속되어 있는지 깨닫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
회개한 성인은 있어도 부패한 성인은 없습니다. 발효인생이 아닌 부패인생은 정말 문제입니다. 답이 없습니다. 과일도 너무 썩으면 버리듯 삶도 너무 부패하면 악취에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습니다. 어제 읽은 글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부패한 민주정부는 결국 국민을 부패시키며, 국민이 부패한 나라는 되살아날 길이 없다...부동산 과다보유자들과 토건족들은 희희낙락했고, 부동산 투기의 바람에 올라타지 못한 사람들은 원인을 따지지 않은 채 불만을 품고 부글거렸다. 우리 사회 다수의 사람들이 정의와 자유를 실현하고, 국민전체의 이익을 도모하는 데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자기를 희생해 나라를 살리려는 의로운 부자도 없고, 애국심과 정의감에 불타 나라를 바로 세우려는 정치인도, 부동산 투기가 아니라 땀 흘려 먹고 살겠다고 결단하는 건강한 시민도, 열심히 공부해서 기업을 일구고, 국가 발전에 이바지하겠다는 학생도 찾아보기 어렵다. 전망은 밝지 않다. 우리 국민의 전반적인 상태가 걱정스럽다.”
다소 비관적인 현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현주소입니다. 얼마전 구조활동을 펼치다 순직한 20세의 해병대원과 교내에서 목숨을 끊은 20대 초등학교 교사의 소식이 깊은 아픔으로 남아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저절로 탄식처럼 나옵니다. 이대로 무너져 내릴 수는 없습니다. 심기일전, 분발하여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의 삶을, 주님을 찾고 만나고 선포하는 삶을, 세상의 소금과 빛의 삶을 살아야 결코 부패하지 않습니다.
기도와 회개는 효소와 같아 삶의 부패를 막아주고 향기로운 발효인생이 되게 합니다. 결코 우리 삶이 썩지 않도록, 부패인생의 되지 않도록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의 전사로 깨어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매일 미사은총이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