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8.21.월요일 성 비오 10세 교황(1835-1914) 기념일
판관2,11-19 마태19,16-22
영원한 생명
-주님과 만남과 따름의 여정-
"주님, 새벽부터 넘치도록 자비를 베푸시어
우리 한생 즐겁게 하소서."(시편90,14)
어제의 새삼스런 깨달음을 잊지 못합니다. 얼마전 두주간의 여름 휴가를 끝내고 귀원한 도미니코 형제를 봤을 때의 반가움과 더불어 깨달음도 생각났습니다. 약4개월 동안 뉴튼수도원을 경유해 쿠바 선교 체험을 떠났던 안토니오 형제가 마침내 어제 귀원한후 끝기도때 모습을 발견했고, 반가움에 형제들의 끝기도 소리도 힘찼던 듯 싶었습니다. 끝기도후 반가움에 포옹하던 형제들의 아름다운 장면도 감동스러웠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갔을 때도 먼저 도착한 형제들의 반가운 환대도 이렇지 않겠나 하는 묵상도 했습니다. 긴 휴가인 듯 하지만 지나고 나면 금방입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귀원합니다. 우리의 지상에서의 휴가시 귀원 날짜는 확실하지만 인생 휴가 끝난후 귀원 날짜는 아무도 모르지만 어느 날에는 죽음과 더불어 인생 휴가도 끝난다는 사실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얼마전 이런 깨달음을 표현한 “새삼 무슨 휴가?”란 짧은 시도 생각났습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휴가나온
인생인데
남은 휴가
얼마
안 남았는데
날마다
휴가인데
새삼 무슨 휴가?”
예외없이 누구나 인생 휴가 끝나면 죽음과 더불어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입니다. 천상병 시인은 귀천이란 시에서 휴가 대신 소풍으로 바꿔 귀천의 마지막 연에서 다음처럼 노래합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과연 이 세상 인생 휴가 끝내고 귀천하는 날, 이렇게 가서 아버지께 인생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을자 몇이나 될런지요?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화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부, 성 베네딕도는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말씀 하십니다. 강물처럼, 쏜살같이 흐르는 세월입니다. 문제는 영원한 생명의 체험입니다.
참으로 인생 휴가중 영원한 생명을 체험했을 때, 영원한 생명의 주님을 만났을 때, 비로소 인생 아름답고 행복했다고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긴 듯 하지만 짧은 인생, 영원한 생명의 주님을 만나지도 체험하지도 못하고 귀가의 죽음을 맞이할 때 참 허무하고 아쉽기 그지 없을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이런 목마름을 고백하는 어떤 사람의 다음 물음은 옛 사막 교부들을 찾았던 구도자들은 물론 우리의 공통적 물음이기도 합니다.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이 물음을 읽고 저는 속으로 웃었습니다. 우리는 이 거룩한 미사중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을 만나 모시는데,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을 바로 눈앞에 두고, 무지에 눈이 가려 보지 못하고 영원한 생명에 대해 물으니 어처구니 없다는 생각입니다. 질문 자체에 문제가 있습니다. 무슨 선한 일을 많이 해서 영원한 생명의 체험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주님을 만나 따를 때 비로소 영원한 생명의 체험이요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어떤 구도자는 영원한 생명은 주님을 만났을 때의 은총의 선물인데 업적의 산물로 착각했던 것입니다. 이런 구도자의 속내를 꿰뚫어 직관하신 주님은 ‘웬만한 계명들은 다 지켜왔다. 그런데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냐?’는 항의성, 도전적 질문에 참으로 강도 높은 처방을 제시합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바로 이 구절은 사막의 안토니오를 회심시킨 복음입니다. 과연 이 말씀을 받아들일자 몇이나 될런지요? 그러나 복음의 구도자는 참으로 영원한 생명의 주님을 만나지 못했기에 슬퍼하며 떠났으니 그 원흉은 많은 재물이었습니다. 많은 재물이 결정적 장애가 되었습니다. 우리 자신을 들여다 보게 하는 참된 회개로 이끄는 주님의 권고 말씀입니다.
참으로 영원한 생명의 주님을 만났다면 계명의 자발적 준수는 물론 저절로 자연스럽게 재물의 포기도 뒤따랐을 것이나 이 부자는 주님을 눈앞에 보고도 참으로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결과는 알 수 없지만 오늘 복음의 부자는 이런 주님과의 만남이 평생의 삶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으리라 생각됩니다. 혹시 후에 재산을 정리하고 주님을 따랐을지도 모릅니다.
계명을 잘 지켜서 영원한 생명의 선물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주님을 만나 따를 때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의 선물입니다. 바로 복음의 제자들은 주님을 만났을 때 저절로 모두를 버리고 주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복음의 제자들은 물론 오늘 기념하는 성 비오 10세 교황을 비롯한 모든 성인들이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을 만났고 평생 주님을 따랐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은총의 선물임을 오늘 본기도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하느님, 복된 비오 교황이 그리스도 안에서, 가톨릭 신앙을 지키고 모든 것을 새롭게 하도록 천상 지혜와 사도의 용기를 주셨으니, 저희에게도 자비를 베푸시어, 저희가 그의 가르침과 모범을 따르고, 영원한 생명의 상급을 받게 하소서.”
영원한 생명의 상급이라며 영원한 생명은 은총의 선물임을 분명히 합니다. 성 비오 10세 교황의 사목표어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Instaurare Omnia in Christo)" 였고 시종일관 가난을 사랑하며 가난을 살았던 교황님의 감동적 고백입니다.
"나는 가난하게 태어났고, 가난하게 살았으며, 가난하게 죽고싶다."
깊이 들여다 보면 모두가 은총의 선물입니다. 이런 자각에서 끊임없이 샘솟는 찬미와 감사기도입니다. 한두번 영원한 생명의 체험이 아니라, 날마다 주님을 만나 따름으로 영원한 생명을 체험함으로 영원한 삶의 참행복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영원한 생명, 주님과 만남과 따름의 여정"이라 강론 제목을 택했습니다. 날마다 참된 회개를 통해 영원한 생명의 주님을 만나니 우리 삶은 회개의 여정이라 할 수 있고 회개와 더불어 날로 영원한 생명의 체험도 깊어갈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부터 시작되는 판관기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가 어디 있는지 잘 드러납니다. 악순환의 패턴의 반복입니다. 바로 오늘 화답송 시편 106장이 이런 악순환의 인간 현실을 보여줍니다. 판관들을 통해 구원해 내면 잠시일뿐 또 우상숭배에 빠지고 또 울부짖으면 주님의 구원이 뒤따르고, 다음 또 배신하고 계속 반복되는 구제불능의 사람같습니다. 원판불변의 법칙이란 말도, 사람을 고쳐 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도 생각납니다.
우리 현실을 봐도 악순환의 반복이요 과연 사람에게 희망은 있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래서 저는 자주 광야인생중 ‘성인이냐 괴물이냐 폐인이냐?’ 셋중 하나라고 말하곤 합니다. 답은 하나 주님과의 만남뿐입니다. 판관기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참으로 주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악순환의 반복입니다. 주님을 만나 참된 회개가 뒤따를 때 비로소 악순환의 늪에서 탈출이요, 영원한 생명의 선물에 성인의 삶입니다.
이래서 끝임없는 자발적 회개의 선택과 훈련, 습관화가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이런 영혼들에게 하사되는 영원한 생명의 선물입니다. 결코 값싼 영원한 생명의 선물은 없습니다. 진인사대천명, 최선을 다해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날마다 선물로 받는 이 거룩한 미사전례시간입니다.
"주님, 당신은 대대로
우리의 안식처가 되시었나이다."(시편90,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