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뜻 -모두가 하느님의 섭리다-2021.3.27.사순 제5주간 토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Mar 27,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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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3.27.사순 제5주간 토요일                                                          에제37,21ㄴ-28 요한11,45-56

 

 

 

하느님의 뜻

-모두가 하느님의 섭리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

 

하루에도 수없이 외우는 ‘주님의 기도’ 서두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예수님의 삶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기도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우연은 없습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느님의 뜻은 아니라 해도 하느님의 허락없이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사謀事는 재인在人이요 성사成事는 재천在天이란 말도 생각납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뜻을 찾아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본질적인 일인지 깨닫습니다.

 

어제 교황청의 전속 설교가이신 칸타라메싸 추기경의 4차 사순시기 강론 역시 은혜로웠습니다. 교황님을 위시한 모든 고위 성직자들이 앉아 강론을 경청하는 모습도 경건하고 아름다웠습니다.

 

“모든 신학적이고 교의적인 토론을 넘어 예수님과의 진정한 사랑의 관계가 무엇을 뜻하는가? 인간 정신에 가장 위대하고 불가해한 신비는 하느님은 한분이시며 삼위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것이다. 그분은 불쌍하고 감사할줄 모르는 피조물인 나를 위해 자신을 바치신 분이다. 그리스도는 이념도 성격도 아닌 살아 있는 인격이다. ‘나’와 그분과의 ‘너’와의 인격적 관계로 들어가지 않으면, 예수님은 인격으로 알려질 수 없다.”는 요지의 강론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인격적 관계가 얼마나 본질적인지 깨닫습니다. 예수님과의 깊어지는 일치와 더불어 하느님의 뜻도 선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최고 의회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는 장면입니다. 하느님의 깊고 넓은 시야로 보면 이 또한 하느님의 섭리임을 봅니다. 결코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일이 예수님의 죽음에 직결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가야파 대사제가 하느님의 뜻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결국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해의 대사제로서 예언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 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그러니 이스라엘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예언입니다. 누가 하느님의 이런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있겠는지요! 사실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의 교회를 통해 서서히 실현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대로 다음 에제키엘 예언의 실현입니다.

 

“나는 그들과 평화의 계약을 맺으리니, 그것이 그들과 맺은 영원한 계약이 될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 그들을 불어나게 하며, 나의 성전을 그들 가운데에 두겠다. 이렇게 나의 거처가 그들 사이에 있으면서, 나는 그들의 하느님의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파스카의 예수님 자체가 영원한 평화의 계약이 되고 우리 가운데에 있는 살아 있는 성전이 됩니다. 참으로 파스카의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의 일치의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예수님과 우리의 인격적 관계가 얼마나 본질적인지 깨닫습니다. 제 졸시 ‘하늘과 산’이 바로 이런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잘 보여줍니다.

 

-“하늘 있어 산이 좋고

산이 있어 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

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

 

하늘이 예수님이라면 우리는 산입니다. 과연 날로 주님과 깊어지는 일치의 ‘예닮의 여정’인지 자문하게 됩니다. 어제의 새삼스런 깨달음도 잊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 외로움은 그리움은 사라지고 함께 계신 주님의 현존감에서 오는 편안함, 기쁨과 감사가 저를 채우고 있다는 자각입니다. 텅 빈 허무나 공허가 아닌 텅 빈 충만입니다. 하여 요즘의 시에는 외로움이나 그리움이란 말마디나 내용이 거의 보이지 않는가 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과 우정의 사랑을 날로 깊이해 주십니다. ‘예닮기도’중 한 연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예수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선물의 하루이옵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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