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과 기쁨 -늘 새로운 시작-2021.12.17.금요일 12월17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Dec 17,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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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17.금요일 12월17일                                                   창세49,1-2.3-4ㄱ.7-8.17 마태1,1-17

 

 

희망과 기쁨

-늘 새로운 시작-

 

 

소속감의 욕구는 우리 인간의 본능적 욕구입니다. 소속감이 또렷해질수록 신원의식도, 정체성도 또렷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족보를 묵상하는 순간 묵주끈에 매달려 있는 묵주알들이 연상되었습니다. 묵주끈에 하나로 연결되어 있을 때 하나하나의 묵주알이 존재 의미가 있지, 묵주끈에서 떨어져 나가는 순간 존재 의미의 상실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의 족보의 끈에, 교회 공동체의 끈에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에 존재 의미가 있는 것이지, 예수님 족보의 끈에서, 교회 공동체의 끈에서 떨어져 나가면 말 그대로 존재 의미의 상실이며 이보다 더 큰 영적 불행도 없을 것입니다.

 

삶은 반복입니다. 하루하루가 늘 새로운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어제 반복의 영성훈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지만 하루하루가 늘 새로운 반복, 거룩한 반복입니다. 더불어 날로 깊어지는 하느님을 향한 희망과 기쁨의 내적여정의 삶입니다. 하여 오늘 강론 제목은 “희망과 기쁨-늘 새로운 시작-”으로 정했습니다. 매해 오늘 12월17일은 대림2부의 시작이 됩니다. 

 

대림2부는 저녁성무일도시 마리아의 노래 후렴, “오”의 감탄사로 시작됩니다. 바로 복음 환호송은 그날의 “오” 후렴이 그대로 인용됩니다. 오늘 대림2부, 첫날 12월17일의 오 후렴도 희망과 기쁨으로 우리를 벅차게 하며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통해 그대로 입증됩니다.

 

“오, 지혜 지극히 높으신 이의 말씀이여, 끝에서 끝까지 미치시며, 권능과 자애로 다스리시는 이여, 오시어 우리에게 슬기의 길을 가르쳐 주소서.”

 

한결같이 우리를 찾아 오시는 대림의 주님께 대한 감사와 놀라움의 고백입니다. 대림시기의 복음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우리를 찾아 오시는 하느님입니다. 예수님 오시는 그날까지 마라나타, “오소서, 주 예수님!” 호흡에 맞춰 끊임없이 화살 기도를 많이 바치시기 바랍니다. 

 

어제 저녁식사중 수도형제에게 들은 사자성어가 새롭게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심상사성心想事成, 마음 심心, 생각 상想, 일 사事, 이룰 성成으로, 뜻인즉 간절한 소망은 언젠가는 반드시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이를 불가에서는 원력願力이란 용어를 사용합니다. 소원의 힘인 원력대로 이뤄진다는 것으로 그대로 간절하고 진실하고 항구한 기도의 힘을 말합니다.

 

또 한 수도형제와의 대화중 ‘사랑의 무수한 잔뿌리들’에 대한 일화도 생각납니다. 요셉 수도원은 큰 은인들이 아닌 무수한 잔뿌리들 같은 사랑의 은인들이 알게 모르게 수도원을 받쳐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수도원뿐 아니라 우리 하나하나 얼마나 고마운 무수한 사랑의 잔뿌리들과의 관계로 이뤄졌는지요! 

 

새삼 우리 삶의 여정은 단독자로서 혼자의 여정이 아니라 “더불어together”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큰뿌리 몇 개 보다는 수많은 사랑의 잔뿌리들이 공동체나 개인의 삶을 건강하고 온전하게 받쳐줌을 봅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심상사성, 마침내 인류의 간절한 염원이 하늘에 닿아 하느님이 우리를 몸소 찾아오시는 희망과 기쁨으로 충만한 대림시기입니다. 대림시기는 물론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친히 우리를 찾아 오시는 희망과 기쁨의 주님이십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가 우리를 찾아오시기 까지의 역사적 기록입니다. 흡사 사랑의 무수한 잔뿌리들로 이뤄진 예수님 사랑의 족보같습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인내와 겸손을 느낍니다. 하루하루 당신의 때가 될 때까지 얼마나 장구한 날을 인내로이 기다리며 겸손히 최선을 다해 온, 참으로 인내와 겸손과 지혜의 하느님이신지 족보에 잘 드러납니다. 

 

마침내 창세기 야곱의 간절한 소망은 유다에 대한 유언에 잘 드러나며 예수님의 탄생과 삶을 통해 야곱의 원대한 꿈은 이뤄집니다.

 

“너 유다야, 네 형제들이 너를 찬양하리라. 유다가 사자처럼, 암사자처럼 웅크려 엎드리니, 누가 감히 그를 건드리랴? 유다에게 조공을 바치고, 민족들이 그에게 순종할 때까지, 왕홀이 유다에게서, 지휘봉이 그의 다리에서 떠나지 않으리라.”

 

역시 심상사성입니다. 그대로 야곱의 꿈이 유다를 통해 마침내 그의 후손, 그리스도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 완전히 실현됨을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담긴 영적 의미가 참 깊고 신비롭고 아름답습니다. 하느님께는 쓸모없다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하나 모두가 하느님 안에서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며 각자는 삶의 제자리에서 구원 섭리의 도구가 됨고 있음을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서 하나로 연결되어 하느님의 구원섭리의 역사안에 있기에 우리 하나하나의 존재가 비로소 삶의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와 뿌리는, 여전히 살아 있는 족보와 살아 있는 뿌리로 교회를 통해 끊임없이 계속됨을 봅니다. 여기 족보에서, 뿌리에서 떨어져 나갈 때 말 그대로 뿌리없는 영적 미아와 같이 표류하는 영적 삶이겠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은 우리의 영적 족보와 뿌리를 확인하며 우리의 정체성을 새로이 하는 복된 시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통해 깨닫는 진리는 허무하고 무의미한 시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비로소 의미 충만한 시간이 되었다는 것이며 성속일여聖俗一如, 성과 속이 하나가 되어 거룩한 세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놀라운 사실은 기구한 여인들의 역할입니다. 하느님의 구원 섭리에 결정적 역할을 한 네 여인, 다말과 라합, 룻과 바쎄바입니다. 

 

다말과 라합은 가나안 원주민 출신이요, 룻 역시 이방의 모압 출신 여자요, 솔로몬의 어머니이자 다윗의 아내인 바쎄바는 본디 히티트 출신 군인 우리야의 아내였습니다. 모두가 비천하고 기구한 출신의 여인들이었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결정적 다리 역할을 했음을 봅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네 여인과 공통선상의 기구한 여인이, 바로 우리 마리아 성모님입니다. 마리아 성모님께서 처녀의 몸으로 예수님을 잉태하고 낳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절정을 이룹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하느님의 결정적 개입과 마리아의 순종으로 마침내 불가사의의 극치인 예수님의 탄생으로 하느님의 소원은 이뤄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족보는 가톨릭 교회를 통해 계속되고 있음을 봅니다. 이를 통해 우리의 신원은 ‘하느님의 사람’이자 ‘그리스도의 사람’이요 교회의 사람’이라는 하나이자 셋인 삼중三重 신원임을 깨닫게 됩니다. 

 

매일의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의 신원의식을 깊이해 주며 하느님의 교회에 깊이 믿음의 뿌리를 내리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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