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 천국天國의 삶 -착하고 성실한 삶;사랑, 지혜, 깨어있음, 책임-2020.11.15.연중 제33주일(세계 가난한 이의 날)

by 프란치스코 posted Nov 15,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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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15.연중 제33주일(세계 가난한 이의 날)

잠언31,10-13,19-20.30-31 1테살5,1-6 마태25,14-30

 

 

 

지상 천국天國의 삶

-착하고 성실한 삶;사랑, 지혜, 깨어있음, 책임-

 

 

 

오늘은 연중 제33주일이자 제4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입니다. 다음 주일은 연중 마지막 제34주일이자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위령성월 11월, 깊어가는 만추의 아름다운 가을날과 잘 어울리는 교회 전례력입니다. 지난 주일, 열처녀의 하늘 나라 비유와 이번 주일, 탈렌트의 하늘 나라 비유도 참 적절하고 고맙습니다. 

 

“하늘 나라는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기는 것과 같다.”

 

기분 좋게 전개되는 복음 서두 말씀입니다. 우선 이런저런 예화를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어제 깊고 푸근하고 아름다운 만추의 날, 예수성심형제회 6분 형제자매들의 오후 피정이 있었습니다. 강의에 앞서 편안히 자리 잡은 모습을 보면서 나눈 서두 말씀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지상 천국의 성인성녀들 같습니다. 지금 여기 주님의 집 수도원에 초대 받아 있을 수 있음도 기적이자 은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상 연옥이, 지상 지옥이 아닌 지상 천국에서 성인성녀답게 사십시오.”

 

바로 미사중 여러분 모두에게 드리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마침 오늘 복음도 하늘 나라 비유입니다. 하여 오늘 강론 제목도 ‘지상 천국의 삶’으로 정했습니다. 엊그제부터 오늘까지 화답송 후렴 셋이 새삼 생각납니다.

 

-“1.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떠라 사는 이들!”

2.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이!

3.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모든 사람!”-

 

묵상하며 ‘아, 행복의 열쇠는 주님께 달렸는 데 주님을 모르는 이들, 주님을 믿지 않는 이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이들은 어디서 참행복을 찾지?’하는 생각이 충격처럼 와 닿았습니다. 참 고맙게도 우리는 주님을 믿고 사랑하고 알기에 행복하게 지상 천국을 살 수 있으니 정말 큰 은총입니다. 어제 수도원 안 벽에 걸려 있었던 침묵沈默이란 한자판 글씨도 감격스러워 안토니오 수사와 나눈 대화입니다.

 

-“사랑하는 도반, 안토니오 수사님! 감사합니다. 1988년 요셉수도원에 부임하던 해, 11월 초발심의 열정으로 쓴 글씨를 보니 새 힘이 솟는 듯합니다. 그러니까 만32년전 40세에 쓴 글씨입니다. 수사님의 아주 훌륭한 학사논문이요, 석사 논문으로 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시간 나는 대로 정독하려 합니다. 논문대로 인간완성에 이르러 성인 안토니오 수사님 되길 간절히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은혜로운 말씀에 저도 힘이 납니다. 영육간에 항상 건강하시길 빕니다. 성인 수사신부님 되시길 빕니다. 침묵의 필체에서 젊은 시절, 신부님의 하느님을 향한 수도생활의 열정이 투영되는 듯 합니다.”-

 

이런 사랑과 정성이 가득 담긴 메시지들이 삶의 활력소가 됩니다. 답은 사랑뿐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마침 연중 피정을 알리는 게시판 소식중 강의 주제가 참 특이했습니다. 

 

“곱게 늙기!”

 

얼마나 재미있는 말마디입니까? 곱게 살기, 곱게 늙기, 곱게 죽기,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사랑뿐입니다. 사랑할 때 예뻐지고 고와집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나를, 내 일상의 삶을, 아니 모두를 사랑하는 길뿐입니다. 성무일도 마리아의 노래 후렴, 즈카르야 노래 후렴 가사도 은혜로웠습니다.

 

“착하고 충실한 종아, 와서 주님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삶을 사랑할 때 착하고 충실한 종이 되어 살 수 있음을 절감합니다. 우리 모두 착하고 충실한 종으로 살다가 하늘 나라 미사잔치에 와서 주님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은혜로운 미사시간입니다. 

 

어제 게시판에 붙었던 수녀원 부고를 알리는 소식도 충격이었습니다. 5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암투병중 심장마비로 선종한 양숙희 이사악 수녀입니다. 주님의 자비를 간절히 청하면서 동시에 오늘 지금 여기서 깨어 사는 일이 얼마나 결정적이고 본질적인지 절감했습니다. 서두가 길어 졌습니다. 어떻게 하면 복음의 칭찬 받은 종처럼 착하고 성실하게 지상 천국의 삶을 살 수 있겠는지 소개해 드립니다.

 

첫째, 사랑하십시오.

사랑밖엔 답이, 길이 없습니다. 주님은 물론 나를, 이웃을, 일상의 모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참으로 사랑할 때 주님을 만납니다. 탓할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우리의 부족한 사랑입니다. 인생은 사랑의 학교입니다. 졸업이 없는 평생학생의 사랑의 학교입니다. 아무리 공부해도 사랑에는 영원한 초보자인 우리들입니다. 

 

우리의 수행이 어렵고 힘든 것은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가난을, 정결을, 순종을, 침묵을, 수도생활을, 형제를 아니 모든 수행을 주님을 사랑하듯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할 때 저절로 성인입니다. 억지로 마지못해서가 아닌 자발적 사랑의 실천입니다. 제가 볼 때 오늘 착하고 성실한 종들은 누구보다 주님으로 상징되는 주인을 사랑했고 자기 삶을 사랑했던 분들입니다. 분도 규칙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아무것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더 낫게 여기지 말라’(성규4,21)일 것입니다.

 

둘째. 지혜로우십시오.

사랑할 때 선사되는 지혜입니다. 사랑과 지혜는 함께 갑니다. 한셋트입니다. 마음의 불치병인 무지에 대한 특효약도 지혜뿐입니다. 성서에서 얼마나 강조되는 지혜인지요. 시편, 잠언, 집회서, 지혜서뿐 아니라 성서 모두가 사랑과 지혜의 말씀으로 가득합니다. 

 

복음의 착하고 성실한 종은 참으로 지혜로웠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을 만나면 기분이 좋습니다. 어제 평화칼럼(김승월 프란치스코) ‘겸손한 종’에 관한 글 중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지도자의 부정적 특징에 공감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 반대로 무지한 사람들입니다. 

 

1.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 2.잘못을 저지르고도 사과하지 않는다. 3.남탓한다. 4.뻔한 거짓말을 당당히 한다. 5.전체를 보지 않고 자기 편만 바라본다. 

 

이 반대로 하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오늘 지혜서는 흡사 ‘훌륭한 아내’ 찬가 같습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삶의 모범입니다. 

 

“그 아내는 한평생 남편에게 해끼치는 일이 없이 잘해 준다. 제 손으로 즐거이 일한다. 가난한 이에게 손을 펼치고, 불쌍한 이에게 손을 내밀어 도와 준다. 우아함은 거짓이고 아름다움은 헛것이지만, 주님을 경외하는 여인은 칭송을 받는다.”

 

이런 훌륭한 아내의 자질은 참 좋은 품성으로 모두가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지혜로운 여인이라면 이웃도 사랑할 것입니다. 이런 지혜의 뿌리에는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주님의 경외함이 지혜의 샘임을 깨닫습니다. 

 

‘가난한 이에게 손을 펼치고’ 대목에서는 문득 제4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 교황님의 담화문 제목-“가난한 이에게 네 손길을 뻗어라”(집회7,32)-이 생각났습니다. 사랑이 지혜입니다. 가난한 이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는 이들이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셋째. 깨어 있으십시오.

요즘 계속 강조되는 내용이 깨어 있음입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바치는 기도도 깨어 있음을 목표로 합니다. 우리는 지금 깨어 미사잔치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사는 이들은 깨어 있는 이들입니다. 모든 불행과 사고나 유혹은 깨어 있지 않을 때, 어둠중에 있을 때 일어납니다. 

 

무지의 어둠을 환히 밝히는 은총의 빛이 깨어 있음입니다. 성전 뒷면 올빼미의 두 눈도 깨어 있음을 상징합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깨어 있습니다. 사랑-지혜-깨어 있음이 하나로 연결되었음을 봅니다. 오늘 복음의 착하고 성실한 종은 물론 슬기로웠던 여종들처럼 깨어 살았음이 분명합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 역시 깨어 살 것을 강조합니다. 주님의 날은, 죽음의 날은 마치 밤도둑처럼 옵니다. ‘평화롭다, 안전하다’할 때 파멸이 닥치는데 아무도 그것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깨어 사는 이들은 예외입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바오로의 말씀이 큰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으므로, 그날이 여러분을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대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

 

넷째, 책임을 다하십시오.

책임을 다할 때 무조건 구원입니다. 사람됨의 기본이 책임감입니다. 운명의 십자가, 책임의 십자가를 사랑으로 지고 끝까지 주님 따라 살면 구원입니다. 오늘 다섯 탈렌트, 두 탈렌트 받은 이들은 책임을 다해 곱절의 결실을 냈습니다. 주님이 보시는 바 삶의 양이, 업적의 양이 아니라 삶의 질, 업적의 질입니다. 자기 주어진 몫에 성실히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결코 이웃이 받는 탈렌트와 우열이나 호오를 비교할 것이 아닙니다. 

 

“잘 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다섯탈렌트 받아 다섯 탈렌트 남긴 자나 두 탈렌트 받아 두 탈렌트 받은 자나 똑같이 칭찬을 받습니다. 이로써 끝이 아닙니다. 더 많은 일이 주어지고 또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야 살아야 할 영원한 현역의 일꾼이요, 은퇴가 없는 죽어야 은퇴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싸울 대상은 이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할 자신입니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쉽사리 좌절하고 실망하는 내가 적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바 1탈렌트 받은 자의 반응입니다. 너무 소심하고 유약하고 겁이 많고 자폐적이라 어떤 시도도 하지 않고 1 탈렌트 고스란힌 묻어 두었다가 주인님께 바칩니다. 

 

참으로 무기력하고 무의욕하고 무감각한 사람입니다. 이건 살아있는 삶이 아니라 완전히 폐쇠적인 죽어 있는 삶입니다. 마침내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지탄받으며 쓸모 없는 종으로 내침을 당합니다. 과연 나는 어디에 속합니까? 그대로 나태와 무기력한 삶에서 벗어나라는, 분발하라는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했더라면 자폐증도 치유되고 자기로부터 벗어나 재능을 잘 활용하며 자유롭게 살았을 텐데 참 안타깝습니다. 한 탈렌트 받은 자의 반응은 죄라기 보다는 병으로 보고 싶습니다. 소심하고 유약한 자폐증 현상은 그대로 그의 한계요 병리현상처럼 생각됩니다. 처벌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치유받아야 할 병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평생 자기에 갇혀 살았던 불쌍한 사람이 아닙니까? 

 

스스로 자초하여 지상 천국이 아닌 지상 연옥을, 지옥을 살았던 한탈렌트 받은 사람의 처신입니다. 혐오의 대상이기 보다는 연민의 대상입니다. 아마 주님은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 충격 요법으로 한 탈렌트 받은 자를 내쳤지만, 조용히 불러 치유의 손길을 뻗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착하고 성실한 주님의 종이 되어 지상 천국의 삶을 삽시다. 1.사랑하십시오, 2.지혜로우십시오, 3.깨어 있으십시오, 4.받은 탈렌트를 잘 활용해 맡겨진 책임을 다하십시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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