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無知의 병 -끊임없는 참된 회개 은총이 약藥이다-2021.8.19.연중 제20주일 목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Aug 19,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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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8.19.연중 제20주일 목요일                                                           판관11,29-39ㄱ 마태22,1-14

 

 

 

무지無知의 병

-끊임없는 참된 회개 은총이 약藥이다-

 

 

 

“당신을 향하여 두 손을 펴들고, 

 내 영혼, 마른 땅처럼 당신 그리나이다.

 

 어디로 가야 할 길 내게 알려 주소서.

 내 영혼 당신을 향하여 있나이다.”(시편143,6.8ㄴ)

 

아침성무일도 시편 성구가 우리 영혼을 하느님께 향하게 합니다말씀을 묵상하며 강론을 준비할 때 늘 먼저 생각하는 것이 강론 제목입니다. 강론 제목은 몸으로 하면 '눈'과 같고 방으로 하면 '창문'과 같습니다. 눈이 없는 몸, 창문이 없는 방은 상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강론 제목을 통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는 강론 내용입니다. 그리하여 강론 제목은 그날 삶의 지표가 됩니다. 

 

어제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떠오른 제목은 “무지의 병-끊임없는 참된 회개 은총이 약이다-”였습니다. 참 많이도 강론시 인용했던 말마디가 무지의 병, 끊임없는 회개일 것입니다. 자꾸 잊어버리는 망각의 병에는 끊임없는 반복뿐이 없습니다. 늘 반복하여 깨우쳐야 할 무지에 대한 깨달음이요 끊임없는 회개입니다. 회개의 여정을 통해 비로소 무지의 어둠에서 점차 벗어나 밝게 생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루를 마치며 늘 반복하여 바치는 끝기도가 어제는 새삼스럽게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가톨릭 교회의 전례는 얼마나 귀하고 고마운지요! 양심 성찰의 회개로 시작하는 끝기도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고백하오니 생각과 말과 행위로 죄를 많이 지었으며 자주 의무를 소홀히 하였나이다. (가슴을 치며)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이로소이다. 그러므로 간절히 바라오니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와 모든 천사와 성인과 형제들은 저를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 주소서.”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죄를 용서하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소서.”

 

날마다 새벽 저에게 강론을 쓰는 시간은 새날에 앞서 지난 하루를 뉘우치는 회개의 시간이자 새롭게 태어나는 파스카의 시간, 공부의 시간, 기도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끝기도 후반의 성모찬송가 맨 마지막 라틴어 말마디도 새롭게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O clemens, O pia, O dulcis, Virgo Maria(오 클레멘스, 오 피아, 오 둘치스, 빌고 마리아; 오 너그러우시고, 오 자애로우시며, 오 아름다우신 동정 마리아님!)”

 

참 아름답고 무한한 위로를 주는 성모찬송가를 부른후 잠자리에 드는 수도자들입니다. 너그럽고 자애로우시며 아름다우신 성모님에 대한 묘사 말마디가 얼마나 좋은지요. 참으로 무지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 참 사람 동정 마리아는 우리 신자들의 모범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성모님을 닮아갈수록 저절로 예수님을 닮게 되어 무지의 어둠으로부터 해방되어 참 자유인이 됩니다. 성모님이야 말로 무지의 병에 대한 참 좋은 답임을 깨닫습니다.

 

어떻게 성모님을, 예수님을, 하느님을 닮아 본연의 하느님 모상으로서의 참나의 모습에 도달합니까? 바로 우리의 평생과제요 답은 회개뿐입니다. 끊임없는 참된 회개 은총이 무지의 병에 대한 최고의 약입니다. 우리의 끊임없는 기도도 말씀 공부도 끊임없는 회개를 지향합니다. 사실 눈만 열리면 모두가 회개의 표징이 됩니다.

 

보십시오. 오늘 복음의 하늘 나라 혼인 잔치 비유에서 잔치에 초대를 거절한 무지의 사람들이, 또 참석했어도 예복을 입지 않은 준비성 없는 무지한 이가 회개의 표징입니다. 우리의 무지를 일깨워 지혜롭고 겸손하게 만듭니다. 멀리 있는 하늘 나라가 아니라 회개를 통해 이미 오늘 지금 여기서 실현되고 있는 하늘 나라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무지에 눈이 가려 절호의 구원 기회를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

 

무지에 눈이 멀어 분별의 지혜를 상실하여 초대를 거부한 당대 유대인들을 지칭합니다. 임금은 진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사르니 바로 70년대 로마군대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을 이와 같이 표현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어 다시는 재건되지 못했고 그 자리에는 ‘이슬람의 모로크(Islamic mosque)’가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이어 등장하는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자 무지의 사람을 지칭합니다. 복음적 삶의 수행이라는 평상시 마련했어야 할 예복을 무지로 인해 입지 못한, 참으로 태만했고 무책임했던 무지의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미사전례 잔치에 참석하기에 앞서, 아니 늘 깨어 오늘 지금 여기서 살펴 봐야 할 내 하늘 나라 잔치의 구원의 예복입니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습니다. 부름 받았다고, 세례 받아 미사에 참석했다고 저절로 다 구원이 아니라 하늘 나라 잔치에 합당한 삶이라는 예복을 입었는가가 구원의 잣대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판관기의 입다는 눈 먼 열심에 경솔히 주님께 서원했고 사랑하는 외동딸을 번제물로 바치니 이 또한 하느님의 뜻과 무관한 무지의 소치입니다. 애당초 이런 인신 제물의 관례는 히브리 종교에는 없었고 주변 이교의 영향을 받은 부정적 결과물입니다. 구약의 하느님은 결코 이런 야만적 인신 제물을 명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산상설교에서 결코 맹세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정말 입다 판관이 하느님 공부에 충실하여 하느님을 아는 지혜와 겸손을 지녔었더라면 이런 어리석은 서원은 하지 않았을 텐데 어리석은 무지의 병으로 스스로 자초한 우행이 참 안타깝습니다. 예나 이제나 여전히 탐진치의 무지의 병에서 자유롭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입니다. 

 

기후재앙도 코로나도 궁극엔 인간 무지의 병에서 기인하며, 내전 상태를 방불케 하는 극단의 정치현실이나 분열 현상도 무지의 상태를 보여줍니다. 참으로 끊임없는 기도와 끊임없는 회개 중에 맑고 밝게 늘 깨어 사는 일이 무지의 병에 좋은 치유제이자 예방제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무지의 병 치유를 위해 아씨시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가 필요할 때입니다.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무지의 병을 점차 치유해주시며 평화의 일꾼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주님,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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