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순위 -하느님 중심과 질서의 삶-2021.9.23. 목요일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1887.5.25.-1968.9.23) 기념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Sep 23,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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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9.23. 목요일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1887.5.25.-1968.9.23) 기념일

하까1,1-8 루카9,7-9

 

 

 

우선 순위

-하느님 중심과 질서의 삶-

 

 

 

“주께서 집을 아니 지어 주시면, 그 짓는 자들 수고가 헛되리리다.

주께서 도성을 아니 지어 주시면, 그 지키는 자들 파수가 헛되리로다.

이른 새벽 일어나 늦게 자리에 드는 것도, 수고의 빵을 먹는 것도 헛되리로다.”(시편127,1-2ㄱ)

 

오늘 말씀 묵상중 떠오른 시편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의 엄중함을 말해 줍니다. 어제 주중 일반 알현 시간에 교황님의 “9.12-15일까지 부다페스트와 슬로바키아 방문은 ‘기도와 희망의 순례’였다”라는 언급이 새삼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평생 여정 역시 기도와 희망의 순례라 칭할 수 있겠습니다. 또 한 예수회 회원이 전한 교황님의 말씀도 기억합니다.

 

“한 말씀이 언제나 내 마음에 다가온다. ‘가까이 있음(closeness)’.

무엇보다 하느님께 가까이 있음이다. 기도를 포기하지 마라! 마음에 닿지 못하는 형식적 기도가 아닌, 참된 기도, 마음의 기도, 하느님과 싸움인 기도, 네가 아무것도 아님을 느끼는 사막 체험의 기도, 우리를 언제나 기다리고 있는 하느님께 근접한 기도를 하라. 우리는 말할 유혹도 있을 수 있다: 나는 바빠서 기도할 수 없다. 그러나 하느님 역시 바쁘다. 하느님은 너에게 가까이 있고자, 너를 기다리시노라 바쁘다.”

 

오늘은 ‘오상의 비오 신부’로 널리 알려진 카푸친 작은 형제회 출신의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기념일입니다. 성인이 선종하신 날이자 동시에 천상탄일로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새로운 생명의 시작임을 알립니다. 성인의 81년동안 생애를 요약한다면 끊임없는 병고에 끊임없는 기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그대로 기도와 신심으로 병고를 극복해온 성인의 파란만장한 생애였습니다.  성인은 자주 “기도하십시오! 희망하십시오! 그리고 초조해하지 마십시오!” 말씀하셨다 합니다. 1968년 9월23일 선종 장면도 감동적입니다.

 

‘9월23일 이른 아침에 비오 신부는 마지막 고해성사를 보고 서약 갱신을 하였다. 비록 더는 기도문을 암송할 수 없었지만,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묵주를 손에 꼭 쥐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비오 신부는 “예수, 마리아”라는 단어를 반복적으로 말하였다. 새벽 2시30분경 비오 신부는 “나는 두분의 어머니를 보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였으니, 그의 생모와 성모 마리아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어 비오 신부는 침상에 누운채 “성모님!”하고 나지막하게 말하고는 선종하였다.’

 

성인의 마지막 임종어가 “성모님!”이니 기도로서 살다가 마지막 기도로서 생애를 마감한 성인입니다. 말그대로 극심한 병고의 와중에도 기도와 희망의 순례여정 인생을 살았던 비오 신부를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2002년 6월16일 시성했습니다.

 

‘기도하고 일하라!’ 유명한 베네딕도 수도회의 모토입니다. 기도하고 일하고, 하늘보고 땅보고, 하느님보고 사람보고, 관상하고 활동하고, 바로 삶의 우선 순위를 말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늘 하느님을 기억하고 늘 기도하라고 눈들면 하늘입니다. 하느님 중심으로 우선 순위가 분명할 때 안정과 평화, 균형과 조화의 삶입니다. 우선 순위하니 예전 피정자들에게 자주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노년의 품위를 위한 우선 순위는 하느님 믿음, 건강, 돈이다. 절대로 이 우선 순위가 바뀌어선 안된다. 우선 순위가 바뀌면 탐욕의 범람으로 초래되는 무질서와 혼란의 삶이다.”

 

하느님 중심을 잃어 안정과 평화, 균형과 조화가 깨진 무질서와 혼돈의 삶이 바로 지옥입니다. 넘지 말아야 할 선, 한계인 금도襟度를 지키게 하는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지옥에는 한계가 없다’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말마디입니다. 무한한 맹목적盲目的인 탐욕이 통제되지 않은, 한계가 없는, 무질서와 혼란의 세상이, 우리의 내면이 지옥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 중심의 삶을 늘 새롭게 하기위해 끊임없는 기도와 끊임없는 회개입니다. 

 

언제나 거기 그 자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의 한결같은 정주 서원의 삶은 하느님께 가까이 있는 삶이자 한계내에서의 삶을 의미합니다. 이런 한계의 훈련과 함께 가는 내적심화와 내적자유임을 깨닫습니다. 우선 순위의 중심이 바로 하느님이요, 그 가시적 중심이 하느님의 집 성전입니다. 제1독서 하까이 예언자를 통해 내리신 주님의 말씀도 그 우선 순위가 성전 건립이었습니다. 진정한 에버랜드는 그 중심에 하느님이, 하느님의 집인 성전이 자리잡고 있는 곳입니다.

 

“주님의 집이 무너져 있는데, 너희는 지금, 판벽으로 된 집에서 살 때냐? 

너희가 살아온 길을 헤아려 보아라. 씨앗을 뿌려도 얼마 거두지 못하고, 먹어도 배부르지 않으며, 마셔도 만족하지 못하고, 입어도 따뜻하지 않으며, 품팔이꾼이 품삯을 받아도, 구멍 난 주머니에 넣는 꼴이다.”

 

그 삶의 중심에 하느님이, 하느님의 집이 없는 삶은, 하느님을 우선 순위 첫 자리에 두지 않는 삶은 말그대로 무지와 허무의 삶이자 밑빠진 독에 물붓는 헛된 삶입니다. 광야 인생중 세상 것들에 중독되어 괴물이나 폐인이 되기 십중팔구입니다. 거듭 이어지는 주님의 간곡한 권고입니다.

 

“너희가 살아온 길을 살펴 보아라.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집을 지어라. 그러면 나는 그집을 기꺼이 여기고, 그것으로 영광을 받으리라.”

 

바빌론 유배후 귀환한 이들이 우선해야 할 일은 주님의 집 성전의 건축이라는 것입니다. 코로나로 인해 주님의 집 성전 전례에 참석하기 힘든 세상이라 한탄할 것이 아니라, 내 몸담고 있는 집이 바로 주님을 만나는 주님의 집임을 깨달아 더욱 간절하고 끊임없는 기도로 ‘삶의 중심과 질서’를 확고히 함이 살길입니다. 

 

오늘 복음의 헤로데 영주의 내면은 얼마나 허약한지요!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당황하며 전전긍긍 불안해 하는 헤로데입니다. 삶의 중심에 하느님이 자리잡지 않기에 두려움과 불안이 가득한 모습니다. 진정 우리 삶의 줏대는 주님이신데 헤로데에게는 삶의 줏대가 없습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 합니다. 바로 헤로데의 극도로 불안한 심중을 반영합니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우리의 영원한 화두로 늘 새롭게 묻고 만나야 할 ‘길이자 진리이자 생명이신’, 우리 삶의 중심인 파스카의 구원자 예수님을 뜻합니다. 바로 헤로데는 이를 몰랐습니다.

 

내 고유의 참나의 성인이 되라 불림받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인생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단 하나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하느님 중심과 질서, 균형과 조화, 안정과 평화의 삶이 날로 새로워지고 깊어질 때 실현되는 하늘 나라에 성인의 삶이겠습니다. 

 

“주님은 당신 백성을 좋아하시고, 가난한 이들을 구원하여 높이신다.”(시편149,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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