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에서 만나는 주님---꽃 같은 인생이다-2021.5.1.부활 제4주간 토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May 0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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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5.1.부활 제4주간 토요일                                                        사도13,44-52 요한14,7-14

 

 

공동체에서 만나는 주님

-꽃 같은 인생이다-

 

 

 

오늘은 이런저런 체험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저에게는 피하고 싶은 못마땅해 하는 부정적 세 감정이 있습니다. 하나는 ‘포만감’입니다. 배불리 먹었을 때의 포만감, 참 부끄럽고 후회스럽기에 과식이나 탐식은 절대 하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하나는 ‘해방감’입니다. 예전 사제 생활 초창기에 수도사제 둘일 경우는 격주로 강론했기에 한 주간 주례와 강론이 끝났을 때의 해방감, 그러나 십여년 이상, 혼자 1년 365일 매일 미사에 강론을 하다 보니 이제는 매일 강론이 생활화되었습니다. 사실 사제 둘이 격주로 하다 끝났을 때의 해방감 역시 완전히 긴장의 끈을 놓는 느낌이라 못마땅해 합니다. 이제 긴장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주례하든 않든 매일 강론을 쓰기 시작한지도 꽤 오래 되었습니다.

 

하나는 ‘비애감’입니다. 몇 달에 한 번 병원에 가서 약봉지를 한 아름 받았을 때 느끼는 좌절감 비슷한 비애감 역시 단연코 곧장 떨쳐버리는 감정입니다. 죄도 젊고 힘있을 때지 나이들어 약먹으며 절대 죄를 짓지 말아야 겠다는 다짐을 하곤 합니다. 참으로 주님 안에서 늘 깨어 있는 겸손한 삶이라면, 또 겸손의 수련, 비움의 수련에 충실한 삶이라면, 이런 포만감, 해방감, 비애감은 저절로 해결될 것입니다.

 

어제 4월의 끝은 오늘 5월의 시작입니다. 신록과 온갖 꽃들이 만발한 계속되는 부활축제 시기에 오늘부터는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에 성모성월입니다. 성모성월이 되면 떠오르는 참 좋아하는 성가 244장입니다.

 

“성모성월이요 제일 좋은 시절/사랑하올 어머니 찬미하오리다

가장 고운 꽃모아 성전꾸미오며/기쁜노래 부르며 나를 드리오리”

 

코로나로 인해 입에 마스크를 하고 이렇게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지 못한지도 일년이 훨씬 넘었으니 예전에는 상상도 못한 재앙의 연속입니다. 모자를 쓰고 안경을 쓰고 복면같은 마스크를 하면 외계인처럼 얼굴을 볼 수도 없고 누구인지 알수도 없으니 이 또한 재앙스런 현실입니다. 회개할 죄가 참 많은 현대인들 같습니다. 죄가 많기에 병도 많습니다.

 

얼마전 60대 중반에 손주를 둔 소녀같은 할머니 자매의 말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외손주에게 신혼 때의 사진을 보여줬더니 “충격을 받았다!” 얘기하더라는 것입니다. 저는 어린 아이가 충격이라는 어휘를 썼다는 사실에도 놀랐지만 공감했습니다. 저 역시 32년전 40대 초반 사제서품때 사진을 보면서 나도 이런 젊은 때가 있었나 충격을 받기 때문입니다.

 

젊어서 성인이지 나이 들어 아프고 병이 들어 갈수록 성인이 되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넉넉하고 편안한, 너그럽고 자비로운 노년이 아니라 까칠하고 신경질적이고 쉽게 삐지는 노년이 될 위험도 다분하고 주변에서 많이 보기 때문입니다. 가끔 할아버지같다, 아버지같다는 말을 들을 때 마다 거울에 얼굴을 비춰보게 됩니다. 나이 40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도 생각납니다.

 

봄은 봄대로 여름은 여름대로 가을은 가을대로 겨울은 겨울대로 좋듯이 인생사계人生四季도 그래야 좋고 이상적일 것입니다. 가을이나 겨울 인생이 봄 인생이나 여름 인생을 선망하여 모방하는 것도 꼴불견일 것입니다. 그 인생 계절에 맞는 고귀한 품위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사실 일출日出의 찬란함도 좋지만 일몰日沒의 고요와 평화도 좋고, 꽃의 봄향기도 좋지만 수수하고 편안한 단풍의 가을 향기도 좋습니다. 때로는 꽃보다 아름다운, 초연한 아름다움의 가을 단풍이듯 인생도 그러합니다.

 

어제 수녀원 미사차 들렸을 때 정원은 온갖 꽃들의 향연이 절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떠나면서 노수녀님께 “꽃처럼 사세요!” 덕담을 드렸을 때, 새롭게 떠오른 꽃과 사람에 대한 묵상이었습니다. 참 신기한 것이 활짝 웃을 때는 그대로 꽃같은 얼굴이 웃지 않고 심각하거나 화났을 때는 완전히 다른 얼굴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여 보속 처방전에 참 많이도 찍어 드리는 스탬프가 “웃어요!”입니다. 꽃에 대한 자작시 셋을 나눕니다.

 

-“사람은 꽃이다

늘 피는 꽃이다“-

 

-“꽃이 꽃을 가져 오다니요!

그냥 오세요

당신은 꽃보다 더 예뻐요”-

언젠가 꽃을 가져온 분께 써드린 시입니다.

 

-“꽃/존재 자체가 시이자 꿈이요

희망이자 사랑/기쁨이자 평화/위로이자 구원이네요

제각기/고유의 모습/크기/색깔/향기를 지닌

꽃같은 사람이네요/사람이 꽃이네요“-

얼마전 글입니다.

 

-“꽃은 필때도 아름답지만 질 때도 아름답구나.

인생도 그랬으면 좋겠다!”-

아주 예전에 썼던 짧은 글도 생각납니다.

 

이런 모든 묵상들에 대한 답을 오늘 복음이 줍니다. 정말 주님을 몰라서, 체험하지 못해서 외로움, 그리움이지 주님을 만나면 충만한 기쁨과 행복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혼자서의 주님 체험은 착각이나 환상이기 십중팔구입니다. ‘함께 죄지으며 살 바에야 이혼하여 죄짓지 않고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란 물음에 단호히 거부했던 일화가 생생합니다.

 

수도자들 고백성사 ‘보나마나’란 말도 있지만 대부분 많은 신자들 고백성사 역시 보나마나한 경우도 꽤 많습니다. 함께 살며 죄짓는 것도 은총입니다. 함께 살기에 죄를 지으며 자신을 성찰하지만, 혼자 살면 죄 안 짓는다 해도 자신의 부정적인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기에 영적 진보도 없습니다. 천국입장은 혼자가 아니라 단체입장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부는 혼자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간다. 둘의 사랑점수를 합해 둘로 나눈후 평균 60점을 넘어야 함께 천국입장이다. 혼자는 아무리 점수 높아도 천국에 못들어 간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만나는 주님입니다. 주님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겠다 하셨습니다. 우리와 함께 계신 임마누엘 하느님, 파스카의 예수님입니다.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함께의 공동체를 찾아 오신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공동체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공동체 덕분에 주님을 체험하는 우리들입니다. 지금 여기 형제 공동체에서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어디서도 못만납니다.

 

두 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있는 곳에 나도 그들과 함께 있겠다 말씀하신 주님이십니다. 믿는 이들의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공동체가 주님을 닮아갈수록 그리스도의 몸의 완성입니다. 날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공동체는 얼마나 이상적이고 아름답겠는지요! 바로 매일 미사가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입니다.

 

참으로 공동체의 축복에 감사해야 합니다. 광야인생 혼자 살다 보면 괴물이, 악마가, 야수가, 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함께 살 때 영적 성장에 성숙이요 상처도 받지만 받는 위로는 더 큽니다. 참으로 함께 할 때 주님도 만나고 외로움도 그리움도 사라져 주님과 함께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필립보를 향한 주님의 말씀은 시공을 초월하여 그대로 주님의 교회 공동체에 몸담고 살아 온 우리 모두를 향합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는 필립보를 한심스럽게 바라보며 하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필리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건강하고 온전한 신비주의입니다. ‘너’와 함께의 단수가 아니라 ‘너희 공동체’와 함께의 복수란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믿는 이들의 공동체는 주님의 몸이자 거처가 됩니다. 참으로 세례받고 수십년이 지나고도, 또 주님의 집 수도원에 수십년을 살고도 늘 함께 계신 주님을, 주님을 통해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다면 정말 헛 산 것입니다. 정말 깊은 영성가라면 형제들의 얼굴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아버지의 얼굴을 희미하게라도 발견할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의미심장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일도 하게 될 것이다.”

 

그대로 사도행전의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환상의 콤비 사도들을 통해서만 아니라 오늘은 교회공동체를 통해서도 입증되는 진리입니다.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은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하셔서 우리를 통해 당신보다 더 큰 일을 하시게 하십니다. 사도행전에서 맹활약을 하는 바오로와 바르나바 사도는 정말 공동체에서 주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이처럼 신바람 나는 말씀 선포입니다. 박해를 받고 도시에서 쫓겨날 때 제자들의 모습에 대한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라는 묘사가 참 신선한감동입니다.

 

꽃같은 사람들입니다. 꽃같은 얼굴들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꽃입니다. 꽃처럼 살라고, 지상에서 천국처럼 살라고 끊임없이 피고지는 꽃들입니다. 우울하고 심각한 성인은 모순이요 그런 성인은 없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을 체험케 하시며 또 함께의 생활중에 당신을 만나 당신의 꽃처럼 살게 하십니다. 저절로 화답송 시편을 노래하게 됩니다. 빨리 마스크를 벗고 맘껏 찬미 노래 할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주님께 환성을 올려라, 온 세상아, 즐거워하며 환호하여라. 찬미노래 불러라.”(시편98,3ㄷㄹ-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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