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중심에 깊이 뿌리 내린 삶 -기도, 일치, 치유, 선포-2020.9.2.연중 제22주간 수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Sep 0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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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9.2.연중 제22주간 수요일                                                              1코린3,1-9 루카4,38-44

 

 

 

하느님 중심에 깊이 뿌리 내린 삶

-기도, 일치, 치유, 선포-

 

 

 

어제 시냇가 산책중 백로를 발견한 기쁨이 참 컸습니다. 두루미인가 황새인가 의아해 했는데 확인해 보니 여름 철새 백로였습니다. 이제 사람뿐 아니라 하느님의 피조물인 자연은 물론 동물과도 평화로운 공존공생,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함을 깨닫습니다. 

 

참 아름다운 분들입니다. 아름다움은 나이와 관계없습니다. 젊음은, 아름다움은 나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 마음에, 정신에 있음을 봅니다. 영혼이, 마음이, 정신이 튼튼하고 아름다우니 외모도 나이에 관계 없이 아름답습니다. 바로 1936생인 85세 고령의 프란치스코 교황님과 최창무 전임 광주교구 대교구장이 바로 그 좋은 예입니다. 최 대주교님을 환대했던 어느 부부의 글이 생각납니다.

 

-“85세의 연세에도 대주교님은 살아오신 이야기, 집안 내력, 6.25 피난, 유학시절, 혜화동 시절을 풀어내시면서 얼마나 기억력이 명료하신지 젊은 우리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젊은 시절 제자를 만나 신명이 나신 대주교님은 ‘군대 시절 이야기’도 참 재미나게 하셨다. 그밖에도 대여섯 시간을 어찌나 재미있게 지난날 얘기를 풀어주시는지 함께 오신 두 분 수녀님도 우리 부부도 정말 신나는 하루였다.”-

 

평범한 내용같지만 감탄했습니다. 85세 연세에도 저토록 총명할 수 있으실까 하는 경이로움 때문이었습니다. 사제생활 초기부터 가끔 인용했던 팬티끈과 팬티천의 예가 생각납니다. 까맣게 잊고 지내다가 20여년 만에 피정 왔던 자매가 상기해준 예화입니다.

 

“팬티끈이 영혼이라면, 팬티천은 육신이다. 팬티끈이 튼튼하면 팬티천이 어떻든 끝까지 입을 수 있지만 팬티끈이 약해지면 아무리 천이 곱고 튼튼해도 팬티를 입지 못한다. 팬티끈이 영혼이라면 팬티천은 육신이며 바로 영혼과 육신의 관계가 이러하다.”

 

제가 착안한 예화지만 참 기발한 지금도 공감이 갑니다. 참으로 영혼이 튼튼하고 건강해야 합니다. 영혼관리가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답은 단 하나 ‘하느님 중심에 깊이 뿌리 내린 삶’입니다. 뿌리의 깊이는 관계의 깊이를 뜻합니다. 날로 주님 중심에 깊이 뿌리내리는 삶은 날로 주님과 깊어지는 사랑의 관계를 뜻합니다. 하여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사제생활 초기부터 지금까지 참 많이도 강조해왔던 강론 주제중 하나가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삶의 중심이 없을 때, 삶의 중심을 잃었을 때 참 허약하고 위태한 삶입니다. 십중팔구 불안과 두려움에 혼란하고 복잡한 삶, 제자리에 정주하지 못하고 뿌리 없이 표류하고 방황하는 삶이 되기 쉽습니다.

 

현대인의 위기도 바로 여기 있습니다. 삶이 깊이와 무게를 잃고 날로 ‘천박(淺薄’얕고 가벼워짐)’해진다는 것입니다. 코로나19팬데믹의 위기 시대, 참으로 하느님 중심을 회복하는 일이, 하느님 중심에 깊이 뿌리내리는 기도와 삶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 일인지 깨닫습니다. 오늘 말씀도 ‘주님 중심의 삶’의 관점에서 보면 이해가 확연해 집니다.

 

보십시오. 시몬의 병든 장모를 고치시고 많은 병자를 고쳐 주신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중심의 중요성을 상기시킵니다. 예수님은 그대로 하느님의 현존입니다. 하느님 중심을 상징하는 예수님이십니다. 삶의 중심이신 예수님께서 가까이 오시니 치유가 일어납니다. 삶의 중심이신 주님과 일치와 더불어 치유되는 영육의 사람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얼마나 신바람나는 장면입니까? 삶의 중심이신 주님을 만나니 온전한 치유의 구원입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시자 시몬의 장모는 즉시 일어나 예수님의 시중을 듭니다. 예수님과 이웃을 섬기라 있는 건강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집단적으로 전체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 보시고 만지시며 고쳐주십니다. 만나는 이마다 하나하나 미소에 눈을 맞추시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연상케 하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주셨다. 마귀들도 많은 사람에게서 나가며,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하고 소리 질렀다.”

 

영육의 치유에 늘 삶의 중심이신 예수님 가까이 사는 일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태양빛에 밤의 어둠이 흔적없이 사라지듯 주님의 빛에 온갖 어둠의 세력들이 흔적없이 사라지니 전인적 치유의 구원입니다. 예수님 역시 늘 하느님 중심과 일치된 삶을 사셨기에 이런 치유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많은 활동후에는 수시로 외딴곳에 머물러 아버지와 관상의 친교로 영육을 충전하셨던 주님이심을 봅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이런 하느님 나라의 복음 선포의 파견자로서의 신원의식, 인기에 영합하거나 현혹됨이 없이 참으로 무엇에도 매임이 없이 자유롭게 복음 선포의 삶에 매진할 수 있었음도 하느님 중심에 깊이 뿌리 내렸기 때문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분도회 수도자들이 평생을 깊은 내적평화와 안정을 누리며 살 수 있는 것도 하느님 중심에 깊이 뿌리 내린 정주서원의 은총 덕분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9월 기도 지향은 ‘지구 자원에 대한 존중(Respect for the planet’s resources)이고, 어제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 메시지 주제는 ‘창조주와의 평화, 피조물과의 조화(peace with Creator, harmony with creation)’였습니다. 한결같이 하느님 중심의 삶을 회복하라는 메시지입니다. 이제 복음 선포의 영역은 피조물의 자연에 까지 확장된 느낌입니다.

 

분열의 치유도 하느님 중심의 일치의 삶에서 가능합니다. 서로 뜻이, 마음이, 성격이나 취향이 맞아 공동체의 일치가 아니라 바라보는 하느님 중심이 같기에 일치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잊어버리고 인간의 방식대로 육적인 사람이 되어 시기와 싸움을 일삼을 때 공동체의 분열은 필연이며 공동체의 일치는 요원합니다. 아폴로파와 바오로파의 분열로 몸살을 앓고 있는 코린토 교회에 대한 바오로의 처방이 참으로 명쾌明快한 명약名藥입니다.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나 같은 일을 하여, 저마다 수고한 만큼 자기 삯을 받을 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이런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오는 깨달음의 겸손, 분별력의 지혜, 질서와 평화의 회복입니다. 주님을 중심으로 서로 상호보완 관계에 있는 자들이 호오나 우열을 비교한다면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일 것입니다. 서로 보완하여 살게 하는 ‘다름’이 공동체의 부요와 축복임을 깨닫습니다. 하나하나가 다 필수불가결의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항구하고 충실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하느님으로 모시는 민족, 그분이 소유로 뽑으신 백성! 주님은 하늘에서 굽어 보시며, 모든 사람을 살펴 보신다.”(시편33,12-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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