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중심의 삶 -영광과 자유-2020.4.7.성주간 화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Apr 0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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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4.7.성주간 화요일                                                           이사49,1-6 요한13,21ㄴ-33.36-38

 

 

 

하느님 중심의 삶

-영광과 자유-

 

 

 

하느님 중심의 한결같은 여여如如한 삶이 제일입니다. 바로 우리 정주의 수도승생활이 목표하는 바입니다. 특히 코로나로 위기를 맞고 있는 작금의 현실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요하지 말고 침착히, 묵묵히, 한결같이 밝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둬 보이는 세상이라도 거기 하느님은 계십니다. 어제 수녀님들의 요청에 참으로 오랜만에 수녀원을 잠시 방문하여 야외 정원에서 성사를 드렸습니다.

 

이미 그 전날 아침, 신문을 가져 오다 수녀님을 만나 십자로 중앙 예수님 부활상 앞에서 고백성사를 드림으로 자연스럽게 이뤄진 일입니다. 예수님 부활상 아래서 환한 햇살을 받으며 고백성사를 드리니 너무나 잘 어울렸고 마음도 참 상쾌했습니다. 

 

코로나 사태에 상관없이 어디에나 피어난 만발한 봄꽃들은 부활의 기쁨을 앞당겨 경축하고 있습니다. 수녀원의 예수님 부활상 앞에도 잘 가꿔진 수선화꽃들이 예쁘게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수선화꽃들은 수도원에만 있는 게 아니라 수녀원에도 있다는 참으로 평범한 깨달음에 써놓은 시詩입니다.

 

-“아주 평범한 진리가 새삼스럽네

수도원만 꽃 있는 줄 알았는데 수녀원에도 있었네

하느님은 수도원에만 계신 줄 알았는데  여기 수녀원에도 계셨네

 

어디에나 꽃 피어나듯  어디에나 하느님 계시네

그러니 꽃찾아 나가지 말 듯이 하느님 찾아 나가지 말게

꽃들 피어난 오늘 지금 여기 천국에서  하느님을 만나세”-

 

그렇습니다. 눈만 열리면 어디서나 만나는 하느님이요 하느님의 선물들입니다. 얼마전 시(詩)에 대한 설명에 공감한 글이 있습니다.

 

“한 편의 시(詩)를 쓴다는 것은 말(言)이 절(寺)을 만나는 일이다. 말이 절을 만나야 비로소 시(詩)가 된다. 시인이 한편의 시를 쓴다는 것은 저마다 마음 속에 절 한 채를 짓는 일이다.” 

 

시에 대한 설명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매일 아름다운 시편을 노래하는 우리들은 그대로 마음 안에 절을, 성전을 짓는 일입니다. 그대로 마음을 거룩한 성전으로 만드는 시편기도의 은총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이사야나 복음의 예수님이 한결같이 담담하게 초연한 자유를 누릴 수 있음도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기인함을 봅니다. 바로 오늘 화답송 시편은 두분의 고백처럼 느껴집니다. 아니 하느님 중심의 정주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저의 힘이신 주님,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주님은 저의 반석, 저의 산성, 저의 구원자시옵니다. 곤경중에 나 주님 부르고, 하느님께 도움 청하였더니, 당신 성전에서 내 목소리 들으셨네. 부르짖는 내 소리 그분 귀에 다다랐네.”-

 

하느님께서 우리 영혼에 주신 참 좋은 선물이 이런 시편들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사랑하여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아갈 때 비로소 아름다운 영혼의 사람들입니다. 결코 괴물이나 악마가 욕망의 노예가 된 좀비가 되지 않습니다. 허무와 무의미, 절망에 늪에 빠지지 않습니다. ‘장애물 경주’같은 광야 인생 무사히 통과해 갑니다.

 

이미 지금 여기서 하느님의 사랑 환히 드러날 그날의 영광을 앞당겨 파스카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바로 제1독서 이사야서의 ‘주님의 종’의 둘째 노래에 나오는 주님의 종이 이의 모범입니다. 아마 우리 예수님도 이런 주님의 종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깊이 확인하셨을 것입니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그대로 우리 믿는 ‘이스라엘’ 각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종의 다음 반응 역시 우리 믿는 이들의 실존적 체험입니다.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그러나 참으로 믿는 이들은 곧장 허무의 늪에서 벗어납니다. 하느님만이 우리를 허무와 무의미의 늪에서 구해 내실 수 있습니다. 참으로 말없이 영혼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치명적 병이 허무와 절망입니다. 곧장 이어지는 주님의 종의 고백은 그대로 우리의 고백이 됩니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 주님은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

 

믿는 이들에게 우연은 없습니다. 하느님 손길의 섭리 안에 살아가는 우리 믿는 이들입니다. 바로 이런 믿음이 고립무원의 처지에 있는 예수님의 수난 여정에 결정적 구원이 되었음을 봅니다. 유다의 배반과 더불어 베드로의 부인에 예수님의 심중은 얼마나 착잡했을지 바로 다음 말씀이 입증합니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유다에 이어 복음의 후반부, 베드로에 주신,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예수님의 마음이 참으로 외롭고 고독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광의 부활을 앞당겨 사셨기에 곧장 어둠에서 벗어납니다. 예수님은 어둔 상황중에도 늘 하느님과 함께 하셨기에 영광과 자유의 삶을 사셨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다음 고백이 이를 입증합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예수님뿐 아니라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해당됩니다. “하느님은 모든 일에 영광받으소서” 수도원 정문의 분도회 모토대로 참으로 우리가 하느님 중심의, 하느님 영광을 위한 삶을 살 때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날로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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