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2020.4.8.성주간 수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Apr 08, 202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2020.4.8.성주간 수요일                                                                      이사50,4-9ㄴ 마태26,14-25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주님, 설마 저는 아니겠지요?-

 

 

 

새벽 얼핏 인터넷 소식을 살펴보다가 두 경우의 말마디가 마음에 충격처럼 와 닿았습니다. 하나는 ‘영혼이 없는 정치’란 말마디에서 ‘영혼이 없는 삶’을 연상했습니다. 영혼은 우리 삶의 중심이자 정체성을 의미합니다. 영혼이 없는 삶이라면 살아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경우, ‘영혼이 없는 삶’은 ‘그리스도가 없는 삶’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대표적 야여 국회의원 입후보자의 말마디입니다. ‘대한민국 폭망했다’, 야후보자의 이 극단적 말마디에 가슴이 철렁하는 충격이었습니다. 부정적 말마디가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 얼마나 큰지요. 이에 대한 여후보자의 ‘대한민국 위대하다’란 긍정적 말마디가 어둠과 빛처럼 극과 극의 대조를 이룹니다. 긍정적 말마디가 미치는 긍정적 영향 역시 얼마나 지대한지요. 

 

‘폭망했다’에서는 절망감을, ‘위대하다’에서는 희망을 갖게 됩니다. 정말 그리스도 예수님을 사랑하고 믿는 인생이라면, ‘내 인생 폭망했다’ 대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인생 위대하다’로 명명하며 벌떡 일어 설 것입니다. 참으로 역경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백절불굴의 영적 삶을 사는 형제자매들을 대하면 저절로 ‘그 인생 위대하다!’는 찬탄이 나옵니다. 

 

요즘 참 자주 힘든 형제자매들에게 카톡으로 “형제님, 수도원 예수님 위로와 평화의 축복 인사 받으시고 행복하세요!” 말마디 인사와 더불어 전송하는 수도원 십자로 중앙 예수 부활상입니다. 어제도 수녀원의 만발한 튜립과 수선화꽃들을 배경한 예수님 상앞에서 찍은 사진과 더불어 축복의 마음 가득 담아 인사를 전하니 참 기분이 좋았습니다.

 

“형제님, 예수님과 제 위로와 평화, 쾌유의 축복인사 받으시고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참으로 예수님과 우정의 사랑은 수도자들은 물론 믿는 이들의 영적 삶에 전부라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분도회 영성도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영성임을 규칙서중 다음 두 구절이 분명히 합니다. “아무것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더 낫게 여기지 마라.”, “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 것이니, 그분은 우리를 다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실 것이다.”라는 구절입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이 영성생활의 성패를 좌우합니다. 이런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이 잘 드러난 끝기도중 찬미가 한연과 제 행복기도중 한연을 다시 나눕니다. 

 

-“우리는 잠을 자도 주님과 함께, 꿈에도 당신만을 뵙게 하소서.

 언제나 한결같이 당신영광을 새는 날 밝아올제 찬미하리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선물의 하루이옵니다.”-

 

이런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의 관점에서 오늘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참으로 그리스도께 대한 우정의 사랑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제자로써의 한결같은 삶이 받쳐 줘야 함을 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의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가 제자직의 본질을 잘 보여 줍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열어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이처럼 주님께 귀기울여 잘 ‘경청(傾聽, 敬請)’하여 듣고 배우는 겸손한 자가, 또 지친 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마음이 온유한 자가 진정 주님의 제자입니다. 상담을 받는 많은 이들이 진정 목말라하는 것은 충고나 조언이 아닌 위로와 격려의 긍정적 말마디입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합니다. 이렇게 주님의 종이라는 제자직에 충실할 때 저절로 다음과 같은 확신의 고백도 터져 나올 것입니다.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 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분께서 가까이 계시는데, 누가 나에게 대적하려는가? 보라,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 주시는데, 나를 단죄하는 자 누구인가?”

 

바로 이점에서, 즉 잘 듣고 말하는 본질적 제자직의 삶에서 유다 이스카리옷은 안타깝게도 실패했습니다. 평생 주님을 섬겼는데 배반으로 그 인생 폭망했으니 얼마나 허망한 인생인지요! 스승이자 주님인 예수님과 평생 함께 했어도 예수님과 우정의 사랑 관계는 참으로 빈약했음을 봅니다. 파스카 식탁에서 주님과 제자들이 주고 받는 대화가 의미심장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 넘길 것이다.” 화두처럼 던져지는 말씀입니다. 만일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다면 섬찟한 마음에 ‘혹시 나는 아닐까?’ 전전긍긍 불안해 할 것입니다. 제자들 역시 이 말씀에 전전긍긍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며 새삼 주님과의 관계를 점검했을 것입니다.

 

-“주님, 설마 저는 아니겠지요?”-

내 마음 나도 모를 수 있습니다. 불안하여 주님의 확인을 받으려는 본능적인 제자들의 반응, 아마 우리의 반응도 이러할 것입니다. 유다 역시 도둑이 제 발이 저린다고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하고 묻습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너는 알 것이다.’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배반자 유다를 지칭한 다음 말씀이 충격과 더불어 화두처럼 주어집니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긴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평생 주님께 모든 것을 바치고 따른 삶이 었는데 이런 결과라면 얼마나 허무, 허망한 인생이겠는지요. 예수님의 죽음이 비록 성경에 따른 것일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유다의 책임입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의 삶을 통해 스승이자 주님이신 예수님과 우정의 사랑을 날로 깊이했더라면 이런 어처구니 없는 실패인생은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어찌보면 유다는 우리 약한 인간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새삼 하루하루 주님과의 관계를 늘 새롭게 점검해야 함을 배웁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과 우정의 사랑을 날로 깊게 해주십니다. 주님과 우정의 사랑을 새롭게 다짐하는 데는 다음 고백이 제일 좋습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Articles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