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together)’, 구원의 여정 -“우리는 ‘섬島’도 아니고, ‘경주競走’중에 있지도 아니하다”-2020.4.12.주일 부활 대축일 낮미사

by 프란치스코 posted Apr 1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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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4.12.주일 부활 대축일 낮미사 

사도10,34ㄱ.37ㄴ-43 콜로3,1-4 요한20,1-9

 

 

 

‘더불어(together)’, 구원의 여정

-“우리는 ‘섬島’도 아니고, ‘경주競走’중에 있지도 아니하다”-

 

 

 

“이날이 주께서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자 춤들을 추자”

 

방금 부른 화답송 후렴은 늘 들어도 흥겹고 신납니다. 오늘 하루 끊임없는 기도로 바치며 은혜 가득 받으시길 바랍니다. 이어지는 부속가는 또 얼마나 아름답고 힘찬지요. 어제 파스카 찬송가 못지 않습니다. 그 일부를 나눕니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 그의 무덤을 부활하신 분의 영광을 

목격자 천사들을 수건과 옷을 내 보았노라 

내 희망 그리스도 살아 계시니 그 제자들 앞에서 갈릴래아로 가시리라

그리스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정녕 부활하심을 우리는 아노니

승리자 임금이시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코로나 사태로 인해 이번 사순절 및 성삼일은 참 기이하고도 특별한 체험이 되었습니다. 가톨릭 교회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입니다. 새삼 지구촌 가족은 물론 특히 대한민국에는 전화위복의 기회가 되고 있습니다. 각자도생이 아닌 전인류가 하나의 운명공동체임을 깨닫게 됩니다.

 

저에게 일어났던 어제의 일도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수도 공동체 형제들이 참 서운했습니다. 뒤늦게 수도형제와 서로 머리를 깎아 주다가 어제와 그저께 형제들이 거의 다 시간을 내어 총선 사전 투표를 했던 것입니다. 집무실에 있는 나에게 연락했으면 함께 했었을 텐데 너무 서운했습니다.

 

“나만 빼놓고 어찌 자기들끼리만 갈 수가 있나? 연락좀 해 줬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충분히 시간도 있었는데---”

 

정말 아쉽고 서운하고 화가 나 부끄럽게도 몇 형제에게 정제되지 않은 민낯을 드러내는 말을 노골적으로 쏟아 내도 서운한 마음은 쉽사리 가라 앉지 않았습니다. 사실 고의성은 전혀 없는 그럴 수도 있는 것을 제가 서운한 마음에 경솔히 쏟아냈던 말입니다. 순간 이를 통해 오늘 강론의 소재가 됬으니 이 또한 하느님 섭리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말씀을 깊이 있게 묵상할 수 있었음은 물론 여기서 태어난 강론 제목입니다. 마침 어제 공부했던 분도 규칙 해설중 충격적 가르침과 연결된 깨달음입니다. 바로 다음의 강론 제목입니다.

 

-‘더불어(together)’, 구원의 여정-

“우리는 ‘섬島’도 아니고 ‘경주競走’중에 있지도 아니하다”

 

분도 규칙 해설 두 대목에서 크게 깨닫고 회개했습니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다만 그리스도 주변에 ‘섬島처럼’ 모여든 이들이 아니라, 교회로써, 하느님의 순례 백성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여정중(on the way with Christ)’에 있다.”- 

이어 또 하나의 대목입니다. 

-“우리는 각자 첫째가 되고자 ‘경주중(in a race)’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 아우구스티노가 말했던 것처럼, 전자는 ‘후자의 관(the crown of the other)’이 될 수 있도록 ‘더불어(together)’ 달리는 중에 있는 것이다.”-

믿는 이들 공동체에 대한 설명이 얼마나 깊고 아름다운지요! 

 

우리 믿는 이들은 결국 각자도생의, 또 고립단절된 섬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여 어제 제가 서운해 했던 것도 바로 이런 공동체성에서 기인된 것임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세요. 모두가 공동체에 속한 개인을 대상으로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더불어 구원의 여정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을까요? 혼자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 공동체와 함께 하면서 세가지 진리를 행하는 것입니다. 

 

첫째, 주님을 간절히, 항구히, 겸손히 사랑하는 것입니다.

간절한 사랑, 항구한 사랑, 겸손한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제 동영상을 보다가 ‘선거는 끝까지 교만하거나 방심해선 안되고 끝가지 간절해야 되고 겸손해야 된다’는 말마디에서 깨달은 진리입니다. 기도든 공부든 사랑이든 그 무슨 수행이든 참으로 간절하고 항구하고 겸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간절하고 항구한 겸손한 사랑이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무덤을 향해 달리던 수제자 베드로보다 애제자 요한에게서 잘 드러납니다. 먼저 베드로보다 무덤에 다다랐으나 무덤에는 베드로를 앞세운 애제자의 모습에서 주님께 대한 간절한 사랑, 항구한 사랑, 겸손한 사랑이 잘 표현되고 있음을 봅니다.

 

참으로 이런 주님께 대한 간절하고 항구한 겸손한 사랑이 있을 때 주님을 만납니다. 주님을 체험합니다. 베드로를 따라 무덤에 들어서서 잘 정돈된 빈무덤을 보는 순간, ‘그리고 보고 믿었다’ 말마디 표현처럼 전광석화 주님의 부활을 깨달은 애제자입니다. 성경을 렉시오 디비나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참으로 주님 향한 간절하고 항구한 겸손한 사랑을 지닐 때 ‘사랑의 눈’이 열려 靈感과 더불어 깊은 의미를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 위에 있는 주님을, 천상의 것을 추구追求하는 것입니다.

지상에 살되 눈길은, 마음은, 궁극의 희망은 하늘에 계신 주님께 두는 것입니다. 절대로 지상 것들에 대한 경시나 경멸이 아닙니다. 참으로 역설적으로 하늘의 주님께 희망을 둘 때, 초연한 이탈의 자유와 사랑도 가능합니다. 참으로 이것이 세상 것들에 대한 집착없는 올바른 아가페 사랑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은 모두가 그리스도의 한 몸의 지체입니다. 그러니 참으로 주님을 간절히, 겸손히 사랑할 때 저절로 그리스도의 한 몸 지체인 형제자매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가 콜로새서 말씀이 참 고맙고 은혜롭습니다. 정말 주님을 간절히, 항구히, 겸손히 사랑하는 자에게 열리는 천상 비전이요, 하여 더욱 천상 것을 추구하는 구도자求道者로 살게 됩니다. 바오로처럼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을 체험한 자에게는 절대적으로 공감하는 진리 말씀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콜로3,1-4).-

 

너무나 깊은 영적 진리가 담겨 있어 ‘끊임없이 샘솟는 우물’ 같다는 느낌도 갖게 되는 대목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느님께 하나로 연결된 참으로 신비로운 우리의 생명임을 깨닫습니다. 평생 화두로 삼아 깨달아가야할 생명의 말씀입니다.

 

셋째, 주님을 증언하며 주님의 증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연인, 주님의 구도자에 이어 주님의 증인입니다. 사도들이나 예언자들은 물론이고 성인성녀들 모두가 주님의 증인으로 살았습니다. 삶자체가 주님을 증언합니다. 제 주변에도 하늘을 밝히는 크고 작은 무수한 별들처럼 사는 분들이 많습니다. 

 

요즘 수도원 땅바닥 아주 낮은 곳에 짓밟히면서도 무수히 피어나는 샛노란 민들레 꽃들이 흡사 ‘땅-하늘’에 떠오른 ‘꽃-별들’처럼 보입니다. 수십년이 지나도 한결같이 때되면 피어나는 무수한 샛노란 민들레 별꽃들입니다. 아주 예전에 써놨던 민들레꽃 시 두편을 나눕니다.

 

-“민들레꽃들 외롭지 않다

아무리 작고 낮아도

샛노란 마음 활짝 열어

온통 하늘을 담고 있다”-2000.4.24.

 

-“어! 땅도 하늘이네 

구원은 바로 앞에 있네

뒤뜰 마당 가득 떠오른

샛노란 별무리 민들레꽃들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 수 있겠네”-2001.4.16.

 

특히 미국 대학에서 영어 연수중 제가 영역英譯한 뒤편의 시를 극찬했던 여교수에 대한 기억도 생생합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에서 부활의 증인으로서 맹활약하는 베드로의 모습이 참 감동적입니다. 예수님 수난중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던 유약한 베드로가 아닙니다. 참으로 부활하신 주님과 하나됨으로 담대한 주님의 증인이 된 별꽃같은 베드로의 존재입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유다 지방과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사흘만에 일으키시어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미리 증인으로 선택하신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두고 모든 예언자가 증언합니다. 그분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증인인 베드로의 진정성 가득한 증언입니다. 참으로 콜로새서의 바오로처럼, 사도행전의 베드로처럼, 우리 프란치스코 교황님처럼, 주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 주님 부활을 증언하는 강론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과 함께, 교회 공동체 형제들과 함께 ‘더불어 구원의 여정’중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섬도 아니고 경쟁의 경주중에 있지도 아니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다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성규72,12). 그러니,

 

1.주님을 간절히, 항구히, 겸손히 사랑하는 것입니다.

2.위에 있는 주님을, 천상의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3.주님을 증언하며 주님의 증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 때 더불어 구원의 여정은 성공적이 될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하시길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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