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중심의 삶 -회개가 무지에 대한 답이다-2021.10.8.연중 제27주간 금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Oct 08,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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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8.연중 제27주간 금요일                                            요엘1,13-15;2,1-2 루카11,15-26

 

 

하느님 중심의 삶

-회개가 무지에 대한 답이다-

 

 

삶의 중심에서 벗어났을 때 극심한 혼란이요 방황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있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아갈 때 바로 거기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아갈 때 비로소 안정과 평화요 다양성의 일치입니다. 

 

제자리의 중심에 자리잡을 때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 수 있습니다. 어제 읽은 법정法頂 스님(1932-2010)이 자신의 스승인 효봉曉峰 대선사(1888-1966)에 대한 글중 제자리의 중요성에 절대적으로 공감했습니다. 물론 두 분 다 이 세상 사람들은 아니지만 종파를 초월하여 그분들이 남긴 교훈과 향기는 영원합니다.

 

“사람은 제자리에 꽂히지 못하면 방황하기 마련이지요. 선승禪僧을 법관法官의 자리에 앉혀 놓았으니 방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효봉 스님의 방랑은 자신이 꽂힐 자리를 찾아 여기저기 해맨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제자리를 찾는 방황이었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효봉 큰 스님은 평소 습관처럼 가부좌를 한 채 1966년 10월 15일 밀양 표충사 서래각에서 세수 79세 법납 42년으로 입적하셨으며 스님의 열반송涅槃頌이 우리 식으로 말해 임종어가 참 인상적입니다.

 

-“내가 말한 모든 법

그거 다 군더더기

오늘 일을 묻는가

달이 일천강에 비치리”

 

吾說一切法 (오설일체법)
都是早騈拇 (도시조병무)
若問今日事 (약문금일사)
月印於千江 (월인어천강)”-

 

이래서 제자리의 정주를 말합니다. 제자리에 꽂힐 때 비로소 성소요 진짜 정주의 삶입니다. 수십년을 살아도 제자리에 꽂히지 못해 내적으로 방황한다면 참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래서 날마다 새롭게 제자리를 발견해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리는 일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적수들과의 싸움입니다. 말 그대로 영적전쟁입니다.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신 예수님께 몇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 모함하며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께 하늘에서 내려 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말그대로 무지의 사람들입니다. 절대적으로 회개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회개를 통한 하느님 중심의 삶이요 무지에서 벗어나 올바른 분별의 지혜입니다. 회개로 마음의 눈만 열리면 예수님의 언행 자체는 물론 곳곳에서 발견되는 하늘의 표징인데 새삼 무슨 표징이 필요하겠는지요. 

 

예수님이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신 것이 너무나 자명한 하늘의 표징인데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냈다 왜곡하는 무지의 사람들입니다.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 사탄도 서로 갈라서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버티어 내겠느냐?”

 

사탄이 얼마나 영리한테 서로 자중지난自中之難 분란을 일으키겠느냐는 말입니다. ‘진보는 분열分裂로 망하고 보수는 부패腐敗로 망한다’는 말도 생각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이 무지로 인한 중심을 잃어 분열이지 영리한 악의 무리인 사탄들은 절대 분열하지 않고 오히려 똘똘 뭉칩니다. 악의 카르텔은 얼마나 강고한지요! 사탄은 절대 분열하지 않습니다. 

 

사실 안에서 분열로 무너지면 아무도 도와 주지 못합니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 다양성의 일치라면 악마가 하는 일은 분열입니다. 이래서 하느님 중심의 삶을 말하는 것이며 끊임없이 깨어 공동체의 일치를 위해 공동전례 기도를 바치는 우리들입니다. 호시탐탐 분열을 획책하는 사탄의 활동을 막는 데는 함께 깨어 바치는 공동기도보다 좋은 수행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귀를 퇴치한 것은 베엘제불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힘임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힘센 자가 완전히 무장하고 자기 저택을 지키면 그의 재산은 안전하다.”

 

내 삶의 중심에 최고로 강한 주님을 모실 때, 내적일치에 참으로 견고한 난공불락難攻不落의 하느님 나라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중심의 삶을 살 것을 촉구합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버리는 자이다.”

 

예수님은 당신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당신 편에 서서 당신과 함께 하느님 중심의 삶으로 사람들을 끌어 모으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 선포의 삶입니다. 새삼 무지에 대한 처방은 회개를 통해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셔들이는 방법뿐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요엘 예언서가 회개를 촉구합니다.

 

“사제들아, 지루옷 두르고 슬피 울어라. 제단의 봉사자들아, 울부짖어라. 밤을 새워라. 단식을 선포하고 거룩한 집회를 소집하여라. 아, 그날! 정녕 주님의 날이 가까웠다.”

 

주님의 날이 가까웠으니 단식하고 기도하며 지체없이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여기 지금 오늘이 바로 회개해야 할 그날이자 주님의 날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의 날이요 주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니 회개로 미사를 시작하듯 회개로 날마다 새날을 열어야 합니다. 회고回顧의 시간은 회개悔改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황인국 몬시뇰의 회고록 서두에 다음 대목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회고의 시간은 그래서 이승에서 허락된 여생을 하느님 뜻에 맞갖게 살아갈 수 있는 지 그 길도 일러준다. 노년老年에 이르면 무엇보다 필요한 게 ‘날 수 셀 줄 아는 지혜’(시편90,12:날수 셀줄 알기를 가르쳐 주시어, 우리들 마음이 슬기를 얻게 하소서)다. 그런 지혜가 부족하면 노욕老慾에 마음이 휘둘리고, 그로 인해 주위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게 된다.”

 

그러니 살아갈수록 삶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고 살면서 날수 셀줄 아는 지혜를 배우며 주님과의 우정을 깊이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더불어 가까울수록 서로 간 ‘거리의 유지’와 ‘절제의 미덕’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그래서 회개로 깨끗해진 마음을 진공 상태로 놔둬 악령이 자리잡게 할 것이 아니라, 주님의 현존인 성령으로 가득 채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 말미가 그 까닭을 알려 줍니다. 

 

‘그 집이 말끔히 치워지고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되면, 더러운 영은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그리하여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

 

이래서 냉담한 이들의 회심이 그리도 힘든 것이며, 날마다 미사를 통해 깨끗한 마음 빈자리에 주님의 성령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 그리도 중요합니다. 어제 읽은 잠언성 말씀이 생각납니다. 

 

‘자연은 진공을 싫어한다. 그러나 악마는 진공을 사랑한다(Nature may abhor a vacuum but the devil loves one!)!’ 

 

무서운 말입니다. 여기서 ‘자연’을 ‘하느님’으로 바꿔도 그대로 통합니다. 깨끗한 빈밭에 채소를 잘 가꾸지 않으면 잡초밭이 되는 이치와 똑같은 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밭입니다. 한가함은 영혼의 원수라는 성 베네딕도의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삶의 중심인 마음 안에 늘 주님의 현존으로,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회개한 우리 모두의 무지의 어둠을 몰아내시고 성령 충만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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