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기도 -기도와 삶-2020.6.18.연중 제11주간 목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Jun 18,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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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6.18.연중 제11주간 목요일                                                                 집회48,1-14 마태6,7-15

 

 

 

주님의 기도

-기도와 삶-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삽니다. 기도가 답입니다. 기도해야 사람입니다. 기도를 좋아하는 것을 넘어 사랑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기도도 사랑합니다. 기도와 삶은 함께 갑니다. 기도하는 사람, 사람의 정의입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기도는 숨쉬는 공기와 같습니다. 숨쉬듯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대화의 소통이요 생명입니다. 기도가 없어 하느님과 불통이면 영혼은 시들어 죽습니다. 급기야 괴물이, 악마가, 폐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 숨쉬듯 기도해야 합니다. 

 

교황님도 어제 수요일 일반알현 시간에 모세의 예를 들면서 신자들이 서로를 위해 기도할 것을 촉구하셨습니다. 성서의 인물들은 예외없이 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은 바로 기도의 사람들입니다.

 

엊그제 선물받은 화분을 ‘고목에 새순이 난 분재’로 강론에 인용했는데 ‘고목古木’이 아니라 ‘행운목幸運木’이었습니다. 참 예쁘고 기분좋은 말뜻의 나무라 행복했습니다. 참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행운목같은 사람이라 늘 행운이 뒤따릅니다. ‘주님을 향한 아름다운 노래’ 시편 150장 1장의 첫 말마디는 ‘행복하여라!’입니다. 하느님 주신 시편 선물의 목적은 우리의 행복에 있음을 봅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되리라.”(시편1,2-3).

 

요즘 계속되는 가뭄에도 초목이 시들시들 하지만 땅속 깊이 뿌리내린 초목들은 초록빛 생명으로 빛납니다. 참으로 거칠고 험한 시절에도 하느님께 깊이 뿌리 내린 기도의 사람들은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처럼 늘 싱싱하며 활력이 넘칩니다. 어렵고 힘든 광야인생, 참으로 기도해야 삽니다.

 

“성체성사가 걸어가는 것 같습니다.”

 

성체성혈 대축일에 한결같이 기도로 밝고 씩씩하게 살아가는 자매에게 준 덕담입니다.

 

“어, 저기 하느님이 일하십니다.”

 

묵묵히 배밭에서 일하는 농부 수도형제를 보며 문득 떠오른 말마디입니다. 어제 농부 하느님이란 강론 제목이었습니다. 뙤약볕 아래 묵묵히 일하는 농부가 흡사 하느님이 일하시는 모습처럼 생각됩니다. 노구老軀를 이끌고 미사 참석차 오시는 분을 봤을 때의 깨달음, “믿음이 걸어 오신다!”라는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모두가 기도하는 사람에 대한 은유입니다.

 

삶이 간절하고 절실하면 말도 글도 기도도 짧고 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빈말을 되풀이 말라 하시며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오늘의 제자들인 우리 모두에게 분명한 기도 지침을 주십니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성 베네딕도 역시 ‘아무것도 하느님의 일보다 낫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성규43,3) 말씀하시며, ‘기도가 하느님의 은총에서 영감을 받은 열정으로 길어지는 경우가 아니라면 기도는 짧고 순수해야 한다’(성규20,4)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예수님은 참 짧고도 순수한, 참으로 본질적인 ‘주님의 기도’를 선물하십니다. 당신의 노하우 기도를 완전 공개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필요한 것을 다 알고 계시는데 왜 기도해야 합니까? 우리가 아쉬워서 필요해서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참나를 알기 위해서입니다. 무지에서 벗어나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본질적 삶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무지의 탐욕에 눈멀어 시간과 정력을 탕진하며 선물인생 헛되이 살아가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참으로 기도할 때 본질적인 삶, 기본에 충실한 삶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제자들인 우리 모두에게 스승이자 주님이신 예수님은 기도의 진수인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기도역시 보고 배우고 살아야 합니다. 사랑처럼 기도도 영원한 초보자처럼 겸손한 자세로 평생 배워야 합니다. 

 

오늘 집회서의 주인공은 엘리야입니다. 그의 제자 엘리사 역시 평생 엘리야 스승에게서 기도를 보고 배우고 살았을 것입니다. 다음 고백은 그대로 엘리사의 고백같습니다. 우리의 경우 당신을 예수님으로 바꿔도 무방할 것입니다.

 

“당신을 본 사람들과 사랑 안에서 잠든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우리도 반드시 살아날 것입니다.”

 

엘리야가 소용돌이에 휩싸여 승천할 때, 엘리사는 영으로 가득 차게 되어 일생 동안 어떤 통치자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아무도 그를 굴복시키지 못했다 합니다. 살아 생전에 엘리사는 기적들을 일으켰고, 죽어서도 그의 업적은 놀라웠으니 바로 기도의 힘, 성령의 힘입니다. 예수님 역시 우리에게 이 거룩한 미사중 당신의 영으로 가득 채우시어 참으로 ‘주님의 기도’대로 살게 하십니다.

 

사람만이 기도하고 기도가 사람의 꼴을 형성합니다. 남는 얼굴은 주님을 닮은 기도한 얼굴인가, 세상을 닮은 기도하지 않은 얼굴인가 둘 중 하나입니다. 거울에 얼굴을 비춰볼 때 주님을 닮은 기도한 얼굴인지 잘 들여다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주님의 기도에 본질적 청원은 일곱입니다. 그대로 예수님의 군더더기 없는 본질적인 평생 삶을 요약하는 기도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기도에 충실하고 항구할 때 우리 역시 그대로 주님을 닮아갑니다. 참으로 필요한 것이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지 투명히 드러납니다.

 

앞의 셋은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뜻이 중심입니다. 우리 모두가 우선 청할 것은 우리 삶의 중심에 아버지를 모시고 그분의 뜻에 따라 그분의 이름을 거룩히 빛내며 아버지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혼자가 아닌 함께 바치는 기도입니다. 

 

특히 주님의 기도의 결정적 자리는 미사중 일용할 양식인 성체를 모시기전 공동체가 함께 노래로 바칠 때입니다. 아버지의 자녀들로서 한 형제자매들임을 감격스럽게 확인하는 일치의 정점頂點이자 은총 가득한 미사중 ‘주님의 기도’시간입니다.

 

우리 모두의 아버지가 되는 하느님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가 되고 함께 이 기도를 바치는 이들은 형제자매가됩니다. 그러니 한가족 공동체의 일치를 이뤄주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참으로 평등한 주님의 형제자매들이기에 갑질이나 차별은 아예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일방적으로 하느님께 모두 해달라는 무책임한 청원이 아니라 우리 역시 청원에 걸맞는 온갖 노력을 다해야 하는 기도입니다. 

 

이어지는 네가지 청원은 정말 필요한 본질적인 기도입니다. 일용할 양식, 잘못한 이들에 대한 용서와 하느님께 용서 받음, 유혹에 빠지지 않음, 악에서의 구출 넷입니다. 청원과 동시에 우리의 응답이 뒤따라야 할 것입니다. 즉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해, 또 잘못한 이들에 대한 즉각적 용서, 유혹이나 악에서의 보호를 위해 깨어 진지한 투신의 노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참으로 우리의 진지한 노력의 응답과 더불어 주님의 기도는 그대로 실현되어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가게 되고 하느님의 나라도 서서히 실현되어 갈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의 기도를 충실히 항구히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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