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그리스도인의 영적 삶 -옷(衣), 밥(食), 집(住)-2021.8.29.연중 제22주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Aug 29,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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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8.29.연중 제22주일                     신명4,1-2.6-8 야고1,17-18.21ㄴ-22.27 마르7,1-8.14-15.21-23

 

 

 

참된 그리스도인의 영적 삶

-옷(衣), 밥(食), 집(住)-

 

 

 

여기 요셉 공동체 형제들이 종종 성인들처럼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어제 성 아우구스티노 기념일 미사 강론 때도 “성인이 됩시다”라는 제목의 강론 서두에 했던 원고에 없던 말이 생각납니다.

 

“요셉 수도 공동체는 성인들의 공동체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 교회 공동체 형제들이, 여기 미사에 참석하고 있는 여러분들이 성인입니다.”

 

사실입니다. 이미 구약은 물론 신약시대에도 믿는 이들의 무리를 성도(聖徒)라 불렀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 성도입니다. 구체적으로 구약에서는 이스라엘로 대표되는 하느님의 백성을, 신약에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을 지칭했습니다. 오늘날 성도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교회에 속한 성도들인 우리는 말 뜻 그대로 성인들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인답게 영적 인간으로 사는 이들이 성도(聖徒)들이자 성인(聖人)들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참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인답게 영적 삶을 살아가고 있는 지요. 세례 받았다 해서 성인이 아니라 평생 참 사람의 성인이 되어 가는 과정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사실 성인이 되는 것은 우리 궁극의 목표이자 성소이기도 합니다.

 

삶의 필수 요소를 흔히 의식주 셋으로 꼽습니다. 의식주 대신에 우리말 옷, 밥, 집이 더 친근감이 갑니다. 참 고맙고도 신기한 것이 중요한 것 말마디는 거의 한 글자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옷, 밥, 집 말고도 돈, 길, 빛, 불, 물, 밤, 낮, 잠등 끝이 없습니다. 

 

의식주, 옷-밥-집이 상징하는 바 근원적인 것이요, 근원적인 영적 의식주가 날로 분명해질 때 보이는 옷-밥-집으로부터 점차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참 그리스도인으로 궁극의 옷과 밥, 집은 무엇이겠는지요.

 

첫째, 그리스도가 옷입니다. 

사랑이 옷입니다. 늘 그리스도의 옷을, 사랑의 옷을 입은 이들이 정말 참된 그리스도인이자 영적 인간입니다. 결코 벗었다 입었다 하는 옷이 아니라, 잘 때는 물론 평생 늘 입고 지내야 할 그리스도의 옷, 사랑의 옷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를 회심으로 이끈 로마서 말씀입니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그리고 욕망을 채우려고 육신을 돌보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로마13,13-14)

 

어제도 인용했던 성구입니다. 그리스도를 입으라고 합니다. 우리 수도자들이 늘 입고 있는 수도복이 상징하는 바 그리스도의 옷입니다. 그리스도의 전사, 그리스도의 학인, 그리스도의 형제, 모두 그리스도를 입을 것을 전제로 합니다. 콜로새서에서 바오로는 사랑을 입으라고 말합니다.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 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 주는 끈입니다.”(콜로3,13-14)

 

참으로 부끄러워야 할 것은 가시적 옷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옷, 사랑의 옷을 입지 않음입니다. 하느님이 보시는 것은 바로 이런 그리스도의 옷, 사랑의 옷입니다.

 

둘째, 주님의 말씀이 밥입니다. 

사람은 밥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삽니다. 말씀의 밥으로 살아가는, 말씀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말씀의 사람’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매일미사와 시편성무일도의 공동전례 기도를 일컬어 영적 주식主食이라 말하곤 합니다. 밥먹듯이 공동전례기도를 통해 날마다 평생 끊임없이 말씀의 밥을 먹고 살아가는 여기 수도자들입니다. 

 

이래야 영적 영양 결핍이나 영적 골다공증이 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완전히 살이되고 피가 되는 것은 수행의 실천을 통해서입니다. 주님께서 모세를 통해 백성에게 하시는 말씀은 그대로 영적 이스라엘 사람들인 우리에게 해당됩니다.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실천하라고 가르쳐 주는 규정과 법규들을 잘 들어라.---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에 무엇을 보태서도 안 되고 빼서도 안된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주 너희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야 한다. 너희는 그것들을 잘 지키고 실천하여라. 그리하면 민족들이 너희의 지혜와 슬기를 보게 될 것이다.”

 

바로 렉시오 디비나, 성독聖讀의 일상화, 생활화를 명령하는 것입니다. ‘읽기-묵상-기도-관상-실천’으로 이어지는 성독의 시스템입니다. 제2독서에서 야고보 사도의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말씀의 밥을 먹을뿐 아니라 말씀의 실천을 강조하는 야고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뜻을 정하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시어 당신의 피조물 가운데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우리의 영적 삶에 얼마나 항구히 결정적 역할을 하는 말씀인지 깨닫습니다. 말씀의 식食이자 약藥입니다. 매일 먹어야 하는 말씀의 밥이요, 실천해야 하는 말씀이요, 매일 진리의 말씀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하는 영적 인간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다음 야고보서에 보다시피 말씀의 실천은 아주 구체적입니다.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깨끗하고 흠 없는 신심은, 어려움을 겪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고,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

 

말씀을 지킬 때 말씀이 우리를 지켜주어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깨끗하고 흠없는 신심에 세상에 물들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그대로 세속의 시궁창에 뿌리 내린 고고한 기품의 연꽃같은 삶입니다.

 

셋째, 하느님이 집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집문제는 심각한지요. 자기 집을, 자기 방을 갖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 모두의 원초적 본능입니다. 이런 가시적 집이 궁극으로 상징하는 바, 하느님의 집, 아버지의 집인 우리 교회입니다. 얼마전 종교 대가에 속하는 분의 글을 읽으며 “이 분은 집이 없구나! 문패가 없구나!”하는 소스라친 깨달음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세상에 집없는 사람들도 많지만 영적 집이 없는 이들은 대부분입니다. 그리하여 집없이 떠도는 영적 미아迷兒들이 너무 많습니다. 집이 있어도 집이 없는 이들입니다. 이에 대한 의미심장한 표현이 있습니다. ‘집에서 집을 그리워하는마음(homesick at home)’, 참 역설적 인간 존재입니다. 이래서 근원적 고독이요 외로움이요 영혼이 마음이 정신이 늘 불안하고 두려운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수도원을 찾는 까닭도 여기 있습니다. 궁극의 영혼의 집, 아버지의 집인 수도원을 찾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의 이구동성의 고백은 여기 요셉 수도원이 아버지의 집, 친정집 같이 편안하다는 것입니다. 

 

수도원 건물마다 ‘자비의 집’,‘ 형제의 집’, ‘평화의 집’, ‘자캐오의 집’, ‘마리아의 집’ 등 반드시 집이 들어갑니다. 이런 집이 궁극으로 지칭하는 바 하느님의 집입니다. 참으로 우리의 영적 집인 하느님의 집인 교회에 정주하며 하느님의 지혜와 슬기를 배워 익힐 때 신명기에서처럼 “이 위대한 민족은 정말 지혜롭고 슬기로운 백성이구나!” 세상의 찬사도 들을 수 있을 것이며, 우리 또한 다음 모세의 말씀에 그대로 공감할 것입니다.

 

“우리가 부를 때 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어디 있겠느냐? 또 내가 오늘 너희 앞에 내놓는 이 모든 율법처럼 올바른 규정과 올바른 법규들을 가진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그대로 이스라엘 민족의 위대함을 그대로 계승한 유구한 전통의 가톨릭 교회입니다. 바로 모세를 통한 주님의 말씀은 그대로 우리들에게 해당됩니다. 온갖 영적 보물을 지니고 있는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로운 참 자랑스러운 가톨릭 교회, 하느님의 집입니다. 제가 참 많은 독서를 합니다만 가치나 양으로 봐도 가톨릭 교회의 무수한 규정과 법규, 문헌과 고전들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의식주, 옷과 밥과 집은 인간 생존의 3대 필수 요소입니다. 눈에 보이는 가시적 의식주는 궁극의 의식주, 그리스도의 옷, 말씀의 밥, 하느님의 집을 가리킵니다. 실로 건강하고 온전한 영혼이나 마음의 성장도 이런 깊은 의식의 자각에서 가능합니다. 영혼이, 마음이 그리스도께, 말씀에, 하느님께 뿌리 내릴 때 튼튼하고 온전한 영적 성장이요 본질적 삶입니다. 이런 영적 인간은 인간 관습을 넘어 하느님의 계명에 집중합니다. 복음에 인용된 이사야 말씀을 그대로 받아 들이며 본질적 영적 삶을 추구합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예수님은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인용해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고수하는 근본주의자들인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비판합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하느님의 말씀을 먹으며 하느님 집에서 사는 마음입니다.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고,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힙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옷을 벗어 버렸을 때, 말씀의 밥을 먹지 못했을 때, 하느님의 집에 머물지 못했을 때 누구나의 그 마음에서 나오는 다음 오물汚物들이 사람을 더럽힙니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그 마음이 주님 안에 머물지 않을 때, 그 마음 안에 주님이 머물지 않을 때 마음은 곧 오염되어 순수를 잃게 되니 인간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그리스도의 옷, 말씀의 밥, 하느님의 집, 이런 영적靈的 의식주衣食住 생활에서 저절로 순수한 마음도 자라나기 마련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 우리의 영적 의식주에 대한 의식을 새롭게 하시며, 마음을 순화하시고 성화해 주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말씀의 밥을 먹으며 하느님의 집인 성전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복된 성도들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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