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定住)의 열매 -내적 힘과 평화(inner strength and peace)-2016.3.23. 성주간 수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Mar 23,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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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3.23. 성주간 수요일                                                                                       이사50,4-9ㄴ 마태26,14-2


                                                                   정주(定住)의 열매

                                              -내적 힘과 평화(inner strength and peace)-


오늘은 ‘정주(定住)의 열매-내적 힘과 평화(inner strength and peace)-’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말씀을 묵상하던중 순간 떠오른 주제입니다. 정주(定住;stability)는 약 1500년 수도전통을 지닌 분도회 수도자들의 첫째 서원입니다. 하느님 중심 안에, 수도공동체 안에 머물러 깊이 믿음의 뿌리를 내리고 평생을 살겠다는 서원입니다. 


비단 분도수도자들만 아니라 진정 주님을 믿는 사람들의 특징은 주님 안에 정주입니다. 참으로 정주 영성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주님의 중심 안에 깊이 뿌리내리지 못해 끊임없는 방황이요 불안과 두려움입니다. 믿음의 뿌리 없이 자기를 잊고, 영혼 없이, 생각 없이 떠도는 영혼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넓이의 활동만 있고 깊이의 관상이 부재하기에 파생되는 온갖 문제들입니다. 


땅속 깊고 넓게 뿌리내릴수록 하늘높이 넓게 가지들을 펼쳐가는 나무의 이치와 똑같습니다. 그러니 절집(寺刹)의 자산은 노목(老木)과 노승(老僧)이란 불가(佛家)의 말이 우리 가톨릭 수도원에도 그대로 적용됨을 봅니다. 땅에 깊이 뿌리 내린 노목이나 하느님 중심에 깊이 믿음의 뿌리내린 노승은 비슷한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없어도 이미 존재 자체가 정주의 영성을 입증하는 노목과 노승입니다.


하느님 중심에 깊이 뿌리 내릴 때 비로소 내적 힘과 평화입니다. 정주의 참 귀한 좋은 열매가 내적 힘과 평화입니다. 하느님과 깊이 연대함에 기인하는 선물인 내적 힘과 평화는 그대로 주님의 힘이자 평화입니다. 바로 오늘 이사야의 셋째 종이 그 모범입니다. 그의 힘과 평화가 어디서 기원하는지 다음 말씀에서 깨닫습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끊임없이 하느님 말씀에 의해 양육되었기에 튼튼한 영혼입니다. 늘 주님 안에 정주하며 말씀과 기도를 통한 주님과의 소통과 친교가 바로 내적 힘과 평화의 원천이었음을 봅니다. 다음 주님의 종의 확신에 넘친 고백은 정주 영성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 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분께서 가까이 계시는데, 누가 나에게 대적하려는가? 우리 함께 나서 보자. 내게 다가와 보아라. 보라,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는데, 나를 단죄하는 자 누구인가?”


하느님 눈으로 자기를 부단히 비춰보는 주님의 종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시야를 지녀야 일희일비, 경거망동하지 않습니다. 깊이 흐르는 물은 고요하고 땅속 깊이 뿌리 내린 나무 역시 온갖 폭풍우에도 곧 제자리를 찾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이사야가 말한 주님의 종을 만납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사면초가 분위기이지만 주님은 추호의 동요도 보이지 않습니다. 직제자인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립니다만 개의치 않고 파스카 음식을 차리도록 독려합니다. 이어 유다를 지칭하며 안타까움을 호소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평소 하느님 중심 안에 정주하지 못했던 유다의 자업자득의 업보입니다. 예수님은 유다를 저주하지도 단죄하지도 않으시고, 오직 그가 처한 불행한 상황을 확인하실 뿐입니다. 이 또한 하느님의 섭리라지만 일생일대 예수님의 가장 아픈 추억에 속할 것입니다.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묻자, 예수님께서는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말씀하시며 에둘러 인정하십니다. 정확히 말해, “맞다. 네가 배신자임을 스스로 밝혔다.”라는 뜻입니다. 유다 또한 우리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불신불립(不信不立)입니다. 주님의 중심안에 깊이 정주의 뿌리내리지 못할 때 변심(變心), 변절(變節), 배신(背信)의 유혹은 늘 상존하기 마련입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를 날로 주님 중심 안에 깊이 뿌리 내리게 하십니다. 정주 영성을 깊이하는 데 매일미사의 수행보다 더 좋은 수행은 없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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