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2.17. 연중 제6주간 화요일 창세6,5-8;7,1-5.10 마르8,14-21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의 하느님
-사막인생, 유배인생, 막장인생-
어제 영적도반과 참으로 오랜만에 저녁식사 중 공감하며 나눈 대화가 신선했고 많은 통찰을 줬습니다. 대화에는 막걸리를 겸한 감자탕의 돼지뼈에 붙은 고기를 뜯는 식사가 참으로 적절했습니다. 한식이든 중국음식이든 각자 먹는 음식은 달랑 먹으면 대화도 더 이상 진척이 안되고 힘들어지는데 고기를 뜯으며 맛좋은 막걸리를 마시니 이야기는 계속 이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아, 대화구조에 맞는 감자탕 식사구나!' 새롭게 깨달으며 감탄했습니다.
"영적 노후대책이 중요합니다. 수도원 밖에서만 아니라 수도원 안에서도 노수도자들을 대하면서도 절감하는 사실입니다.“
나 혼자 많이 말하고 도반은 듣는 편이었지만 절대적으로 공감했습니다.
"아, 벌써 그렇게 됐나요?“
영적 노후대책이란 말마디에 화답한 도반입니다.
"외롭고 쓸쓸한 노후에도 혼자 잘 지내는 법 말입니다. 의식주의 노후대책 보장보다는 영적노후 대책, 주님과의 친교입니다. 진정 하느님께 희망을 둔, 영적으로, 내적으로 풍요롭게 하는 기도의 삶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어 대화중 공감한 부분이 많은 수도자들이 나이들어갈수록 꿈과 희망을, 의욕을 잃고, 사막인생, 유배인생, 막장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수도원 안이나 수도원 밖이나 삶의 본질은 똑같습니다. 말 그대로 사막인생이요 유배인생이요 더 이상 물러날 길 없는 배수진을 치고 사는 막장인생의 대부분 사람들입니다. 사실 이런 깨달음이 동병상련(同病相憐), 동료도반들에 대한 '연민의 샘'이 되어 평화로운 공존의 삶을 가능하게 합니다.
바로 오늘 창세기에서 전개되는 내용을 봐도 그대로 입증되는 삶의 진리들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 유배인생을, 사막인생을, 막장인생을 살아가는 아담과 하와 그 후손들인 우리들입니다. 하느님은 유배중에 있는 당신의 사람들을 계속 살펴보고 있는 분위기가 오늘 창세기 1독서입니다.
"내가 창조한 사람들을 이 땅 위에서 쓸어버리겠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과 기어다니는 것들과 하늘의 새들까지 쓸어버리겠다. 내가 그것들을 만든 것이 후회스럽구나!“(창세6,7).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지고, 그들 마음의 모든 생각과 뜻이 언제나 악하기만 한 것을 보시고,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아마 오늘날 세상을 보신다 해도 하느님의 후회와 아픔은 여전 하실 것입니다.
답답하기로 하면 오늘 복음의 주님께 꾸중듣는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마르8,17-18).
그대로 우리 모두의 분발을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영적 깨달음이 없는 것은 마음이 완고한 탓입니다. 마음이 완고하니 이해하지도, 깨닫지도, 기억하지도 못합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합니다.
하느님을 보라 있는 눈이요,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라 있는 귀입니다. 하느님을 기억하라 있는 머리이며, 하느님을 사랑하라 있는 마음입니다. 하느님을 뵈옴이, 하느님의 말씀을 들음이 유일한 답입니다. 사막인생, 유배인생, 막장인생의 유일한 '구원의 출구(EXIT)'는 하느님뿐입니다. 하느님을 만나야 삽니다.
궁극의 희망은 하느님뿐이며 하느님께 희망을 둘 때 비로소 샘솟는 의욕과 열정, 기쁨입니다. 하느님을 만날 때 비로소 사막인생은 기쁨과 희망의 오아시스 낙원인생이 되고, 유배인생은 축복받은 자유인생이 되며, 막장인생으로부터의 도약이, 내적초월이 이루어져 대자유인의 삶이 됩니다.
아, 바로 그 대표적, 상징적 인물이 오늘 창세기의 노아입니다. 노아 한 사람에게 희망을 거는 하느님의 희망이 참 눈물겹습니다. 사람은 많은데 사람은 없는 역설적 현실입니다. 말그대로 '하느님의 가난'입니다. 노아와 같은 의인 하나가 하느님께는 더없이 큰 희망이자 기쁨입니다.
'그러나 노아만은 주님의 눈에 들었다.‘(창세6,8).
이어지는 다음 구절이 노아의 인품을 한 눈에 보여줍니다.
'노아의 역사는 이러하다. 노아는 당대에 의롭고 흠 없는 사람이었다. 노아는 하느님과 함께 살아갔다.'(창세6.9).
얼마나 고무적인, 닮고 싶은 노아의 삶인지요. 사막의 오아시스 희망의 샘물같은, 사막에 꽃처럼 피어난 의인 노아입니다.
마치 노아 이전에 나타났던 에녹을 연상케 합니다.
'에녹은 하느님과 함께 살다가 사라졌다. 하느님께서 그를 데려가신 것이다.'(창세5,23).
토마스 머튼의 서품 상본의 성구로 택한 구절이기도 합니다.
세상 눈에, 사람 눈에 들지 않아도 주님의 눈에 들면 됩니다. 노아같은 의인이 없다 탄식할 것도, 노아같은 의인을 기다릴 것도 없습니다. 언제나 깨달아 살면 늦지 않습니다. 지금 여기서부터 심기일전(心機一轉), 나 스스로 노아처럼 주님의 눈에 드는 삶, 주님 보시기에 좋은 삶, 모든 일에 주님께 영광을 드리는 의인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매일 이렇게 새로이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좋은 영적노후대책도 없습니다.
'노아는 주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다 하였다.“
순종의 사람, 하느님과 원활한 소통의 사람, 노아입니다. 어제 감자탕 식사와 더불어 마신 막걸리 이름은 '장수(長壽)'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께 순종하며, 하느님과 함께 살아갈 때 '영적(靈的) 장수(將帥)'에 '영적 장수(長壽)'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당신 앞에서 정성껏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 모두에게 노아처럼 의인이 되어 살 수 있는 은총을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ㄴ).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