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의 여정-2016.5.18. 연중 제7주간 수요일 (5.18 민주화 운동 기념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May 18,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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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5.18. 연중 제7주간 수요일 (5.18 민주화 운동 기념일)

                                                                                                                                야고4,13-17 마르9,38-40


                                                                               비움의 여정


비움의 여정은 겸손의 여정이자 사랑의 여정이요 자유의 여정입니다. 자기를 끊임없이 비워갈수록 너그럽고 자비로운 주님을 닮아 진정한 영적성장이요 성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래야 서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평화로운 공존의 사랑입니다. 건드리지 않고 그냥 놔두는 사랑입니다. 다름이 틀린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삶의 풍요로움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 같은 신발이 하나도 없네요.”


새삼스런 발견에 피정온 20여명 형제자매들에게 말하니 모두 웃었습니다. 신발뿐 아니라 머리 모습도 다 달랐고 옷도 다 달랐습니다.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다양한 개성들이 조화를 이루니 다양성의 일치요 아름다움입니다. 그러니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더불어 행복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은 얼마나 편협하고 배타적인지요. 주님을 독점한 듯 교만한 엘리트주의까지 감지됩니다. 이래선 평화로운 공존은 불가능합니다. 이런 편가르기는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은 참 어리석은 일입니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았습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를 쫓아내는 것이 분명 좋은 일이라면 설상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이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더라도 묵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편협하지도 독선적이지도 배타적이지도 않았습니다. 모두에게 활짝 열린 너그럽고 자비로운 분이셨습니다. 참으로 유연하고 신축성이 좋은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두를 하느님의 마음으로, 하느님의 눈으로 보는 분이셨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너그럽고 자비롭기가 바다가 된 분이셨습니다. 얼마전 나눴던  ‘바다가 되었다’라는 자작시가 생각이 납니다.


-아래로/아래로 

흘러 바다가 되었다


넓고/깊은 

바다가 되었다


모두를/받아들인

바다가 되었다


하늘에/닿은 

수평선의 바다가 되었다-


아 바로 이것이 비움의 여정, 겸손의 여정이 목표로 하는 현실입니다. 하늘이신 하느님께 닿은 수평선의 영성, 수평선의 사랑입니다. 일상의 모두를 이런 비움의 계기로 삼아, 넓어지고 깊어져 ‘있는 그대로’의 이웃을 받아들일 때, 말 그대로 평화로운 공존입니다. 바로 다음의 예수님의 답변에서 이런 바다가 된 예수님의 넉넉하고 자비롭고 자유로운 모습이 감지됩니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바로 이런 넉넉한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이자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이런 넓고 깊은 시야가 예수님의 시야이자 하느님의 시야입니다. 그러니 무슨 일을 판단하거나 분별할 때는 ‘과연 예수님은 이런 경우 어떻게 하셨을까?’ 예수님을 잣대로 하는 것이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때로 조언이나 충고를 하려는 생각이 든다면, ‘너나 잘해!’ ‘네가 뭔데!’라는 말을 넣어 자문한 후 말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연민의 사랑이 분별의 잣대입니다. 인간현실에 대한 깊은 통찰에서 나오는 모두를 불쌍히 여기는, 측은히 여기는, 가엾이 여기는 연민의 사랑이 제일입니다. 나름대로 얼마나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인지요. 야고보 사도의 통찰이 우리를 겸손하게 합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 저런 일을 할 것이다.’하고 말해야 합니다.”


이런 덧없고 허약한 인간현실에 대한 깊은 통찰에서 기인한 겸손이요 너그러움이요 자비로움입니다. 결코 허세를 부리거나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습니다. 인간현실을, 자기를 몰라서 허세요 판단이지, 진정 인간현실을, 자기를 알아간다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겸손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을 닮아 너그럽고 자비롭고 겸손한 사람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오늘 화답송의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그대로 자기를 비운 겸손한 사람을 뜻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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