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이 답이다 -영원한 삶의 모델이신 예수님-2018.8.21. 화요일 성 비오 10세 교황(1835-1914) 기념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Aug 21,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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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8.21. 화요일 성 비오 10세 교황(1835-1914) 기념일 

에제28,1-10 마태19,23-30



하느님이 답이다

-영원한 삶의 모델이신 예수님-



제가 요즘 참 많이 강론 제목으로 택한 것이 ‘---이 답이다.’, 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답이다, 회개가 답이다, 사랑이 답이다,--- 등 참 무수히 많습니다. 하나의 답이 아니라 무수한 답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하느님이 답이다’ 라는 한마디 말로 요약됩니다. 하여 우리 수도자들은 하나의 답인 하느님 찾기에 전 생애를 걸고 살아갑니다. 하느님은 우리 수도자들의 영원한 화두입니다.


하느님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통해서만알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 믿는 이들의 고백입니다. 하여 오늘 강론 제목은 ‘하느님이 답이다-영원한 삶의 모델이신 예수님-’으로 정했습니다.


참으로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참 사람이 되는 평생공부보다 어렵고 중요한 공부는 없습니다. 답은 하나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닮아 가는 겁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복된 성소입니다. 바로 이런 참 사람의 본보기가 가톨릭교회의 자랑인 성인들입니다. 성인들을 통해 예수님의 얼굴이 보이고 하느님의 영광이 빛납니다.


어제 성 베르나드도 아빠스에 이어 오늘은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입니다. 성인들을 통해 확실히 확인되는 네 사실은 1.산 햇수가 다 다르다는 것과, 2.언젠가는 반드시 죽는 다는 것과, 3.똑같은 성인은 없다는 것과, 4.마지막으로 우리 믿는 이들 역시 성인이 되라고 불림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제 읽은 말마디 하나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다려 온 인물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성인을 기다리지 말고 우리 자신이 기다려 온 성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답은 하나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참나의 고유한 성인이 될 수 있고 우리 믿는 이들의 궁극 목표입니다.


오늘 기념하는 성 비오 10세는 참 많은 성덕을 지녔지만 두 가지 사실만 언급하고 싶습니다. 하나는 본기도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것’(에페1,10)이 성인의 모토였고, 성인의 유언과도 같은 ‘나는 가난하게 태어나, 가난하게 살아왔고, 가난하게 죽고 싶다.’는 고백입니다.  하여 성인의 장례식도 아주 간소했고 단순한 무덤에 묻혔다 합니다. 참으로 가난을 사랑했으면서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성덕에 업적을 남기신 성 비오 10세 교황입니다.


강론 서두가 길었습니다. 하느님이, 예수님이 답입니다. 하느님이, 예수님이 빠진 사회는, 문화는, 인간은 필히 병들게 되고 타락하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은 세상의 소금이자 빛이기 때문입니다. 소금같은 하느님이 빠지면 세상은 필히 부패하게 되고 빛이신 하느님이 빠지면 세상은 필히 어둠속에 타락하게 됩니다.


저는 오늘 날 현실을 감히 병든 사회, 병든 문화, 병든 인간이라 진단합니다. 길잃은 문명이자 눈 먼 맹목적盲目的 문명이라 칭하고 싶습니다. 다 있는 데 볼 수 있는 지혜의 눈이 없으면 얼마나 답답하겠는지요. 바로 하느님이 우리의 눈과 같습니다. 저에게는 하늘을 향해 끝없이 치닫으면서 서서히 땅에서 멀어지는 무수한 고층 건물들이 흡사 하느님을 잊어 교만해진 창세기의 바벨탑처럼 보입니다.


새삼 인간의 어원을 생각하게 됩니다. 인간homo도, 겸손humilitas도, 흙humus에서 기원합니다. 그러니 흙같이 겸손해야 비로소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런 흙으로 사람을 만들었다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하느님은 하느님이고 사람은 사람입니다. 사람이 결코 하느님일 수 없고, 흙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사람은 병들고 비인간화될 수뿐이 없습니다.


어제 북한의 실상을 보며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느님이 감쪽같이 빠졌습니다. 공산주의 사회든, 사회주의 사회든, 자본주의 사회든 공통점은 하느님 눈이 없다는 것입니다. 평양의 유치원과 초등학교 교원을 양성하는 교원대학생의 수준이 김일성대학생들을 능가하며 미래를 위해 과학에 투자하는 계획도 놀라웠습니다. 이들 교육의 핵심 주제는 종합지능과 과학기술입니다. 김일성 주석의 ‘아이들은 왕이다’라는 훈령이 전통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합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이것이 기능의 기계이지 사람입니까? 사람을 만드는게 아니라 기계를 만듭니다. 자유방임 사회도 나쁘지만 획일적 통제사회도 나쁩니다. 북한 교육에는 하느님이 통째로 빠져 있습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한국 기자의 안내를 맡은 북한의 해설사들에 대한 묘사도 충격입니다.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실을 알아 이해를 깊이하려는 것입니다.


‘수령님(김일성 주석), 대원수님(김정일 국방위원장), 원수님(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말을 소개할 때 마다 북측해설사들의 눈빛은 진지하다 못해 꿈결을 더듬는 것 같았다. 감정이입이 완벽에 가까웠다. 눈물이 그렁그렁하기도 했다. 접촉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북측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최고존엄의 말은 알파요 오메가였다. 변화든 진화든 그 점만은 변할 수 없다.’


하느님 그 자리에 최고존엄의 사람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하느님 신앙보다 더 깊은 최고존엄의 사람에 대한 신앙입니다. 이를 어찌해야 하나? 우상숭배라 단순히 치부해 버릴 수 있나? 우리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참 어려운 숙제입니다.


하느님 없이는 참 사람이 되는 길도 없습니다. 자기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영혼의 거울이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회개도 겸손도 온유도 애당초 불가능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완고하고 교만한 괴물같은 사람만 남습니다. 바로 제1독서 티로의 군주가 그러하며 주님은 에제키엘 예언자들 통해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아, 티로의 군주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너는 마음이 교만하여, ’나는 신이다.‘ 하고 말한다. 너는 신이 아니라 사람이면서도, 네 마음을 신에 비긴다.”


하느님을 잊은 무지한 인간의 전형을 보는 듯합니다. 그대로 하느님을 잊은 오늘날의 교만한 자들에게 주는 말씀이며 제1독서에 보는 바와 같이 이들의 종말은 파멸입니다. 부유함과 교만은 함께 갑니다. 하느님 자리에 ‘돈’이 있을 때 부자는 저절로 교만해지기 마련입니다. 오늘 복음의 부자들에 대한 예수님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내가 다시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를 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부자의 구원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돈중독, 재물중독 역시 약이 없습니다. 그렇다 하여 가난한 자들은 무조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갑니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돈이나 재물은 없어도 마음은 집착이나 미움, 부자들에 대한 질투나 증오로 가득 차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자의 구원 가능성을 언급하십니다. 무지의 부와 교만에 대한 답은 하나 하느님의 은총뿐입니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하느님 주시는 끊임없는 회개의 은총으로 부자가 이탈과 겸손의 덕을 지닐 때, 하여 재물의 노예가 되지 않고 재물의 주인이 되어 자선을 행할 때 부자의 구원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부자이면서도 실로 하느님의 은총으로 가난한 마음, 깨끗한 마음을 지닐 때 비로서 가능한 부자의 구원입니다. 부와 교만의 무지의 벽을 깨트릴 수 있는 분은 하느님 은총뿐입니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귀족은 의무를 진다'는 뜻의 프랑스어 표현입니다. 부와 권력은 그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수반한다는 의미를 가지며, 주로 사회 지도층 혹은 상류층이, 부유층이 사회적 위치에 걸맞는 모범을 보이는 행위를 표현할 때 쓰이는 용어입니다. 


하느님 은총으로 부자이면서도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겸손하고 자비로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사람들은 그대로 구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병든 서구사회를 그나마 지탱하고 있는 것이 바로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입니다. 


끝으로 주님은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른 이들에게 내세에서는 물론 현세에서도 한량없는 축복을 말씀하십니다. 사실 날마다 안팎으로 서서히 자기를 버리고 주님을 따라 나선다는 자체가 참 사람되는 축복의 길임을 깨닫습니다. 초발심의 자세로 끝가지 첫째가 되어 살라는 주님의 경책警責 말씀입니다.


“그런데 첫째가 꼴지 되고 꼴지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예수님을 닮은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항구하고 충실하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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