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심과 응답 -주님과 늘 새로운 만남-2021.7.2.연중 제13주간 금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Jul 02,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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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7.2.연중 제13주간 금요일                                          창세23,1-4.19;24,1-8.62-67 마태9,9-13

 

 

 

부르심과 응답

-주님과 늘 새로운 만남-

 

 

 

참으로 나를 되돌아보게 하는, 부끄럽게 하는, 분발케하는, 질문하게하는 감동을 주는 책이 글이 말이 삶이 사람이 참으로 좋은 책이요 글이요 말이요 삶이요 책입니다. 이런면에서 성경보다 더 좋은 책은, 예수님보다 더 좋은 분은 없습니다. 요즈음 참 감동적인 책을 뒤늦게 읽었습니다. 책을 손에서 도저히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직도 꽤 많이 남았습니다만 이렇게 감동적인 평전은 처음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느낌이었습니다. 제가 볼 때 시인이자 신비가이자 혁명가인 이 사람이, 정말 진짜 하느님의 시인이자 신비가이자 영적 혁명가인 예수님을 만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예수님은 참 좋은 그의 스승이자 친구가 되어 그의 열망을 해결해 주었을 텐데 아는 아쉬움이 큽니다.

 

이제 영원히 살아있는 전설과 신화가 된 그의 이름,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1928-1967)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과 같은 아르헨티나 출신의 공산주의 혁명가, 정치가, 의사, 대학교수, 외교관, 저술가 등 참 다양한 면모를 지닌 불가사의한 인물입니다. 그가 혁명의 전사로 뛰어들면서 그의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저는 예수와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습니다. 저는 힘이 닿는 한 모든 무기를 동원하여 싸울 것입니다. 저들이 나를 십자가에 매달아두게도 하지 않을 것이며 어머니가 바라시는 방식대로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어지는 다음 글도 감동적입니다. ‘체 게바라는 “전사 그리스도”이자 영혼의 순례자 였다. 신을 믿지 않았던 그는 오직 인간만을 믿었다. 그래서 그는 늘 ’새로운 것’을 추구했다. 그것이 비록 이루어질 수 없는 유토피아를 좇는 것이라 해도 자신의 신념을 위해 노력하는 강인한 정신과 용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다른 사람들의 고통까지 함께 했다. 바로 휴머니즘의 전도사였다. 별이 없는 꿈은 잊혀진 꿈이다. 별이 없는 꿈은 깨어 있는 꿈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 모두 눈을 크게 떠야 한다. 체 게바라는 한 번도 눈을 감아본 적이 없다, 언제나 지금 여기를 살았다.‘ 

 

흡사 성인 평전을 읽는 느낌이었습니다. 그가 정말 ‘영원한 별이자 꿈’인 예수님을 만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지금도 여전합니다. 부질없는 ‘만약?’의 질문이지만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요! 예수님을 만남으로 완전히 운명이 바뀐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우리의 영원한 별이자 사랑이자 꿈, 운명이 되었습니다. 결코 우연의 만남이 아니라 섭리의 만남이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먼저 부르셨기에 주님과 은총의 만남입니다. 이런 만남 역시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과제가 됩니다. 만남에 걸맞는 삶을 사는 것이 우리의 평생 과제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합리주의 철학자 데칼트의 언명입니다. 그러나 유대인 랍비이자 신비가인 여호수아 헤쉘은 “나는 불림을 받았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언명에 절대적으로 공감합니다. 주님의 부르심으로 인해 비로소 참으로 존재하며 살게 된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 역시 부르심에 따라 참 나를 살고 싶어하는 갈망이 절묘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함으로 우리 모두 예수님의 꽃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바로 오늘 마태오 세리가 그 모범입니다. 길을 가시다가 세관에 앉아있는 마태오를 보신 예수님은 “나를 따라라.” 부르시자, 그는 즉시 일어나 예수님을 따릅니다. 이제 세리 마태오에게 예수님은 삶의 목표가 방향이 중심이 의미가 되었음을 뜻합니다. 말그대로 예수님과 결정적 운명의, 구원의 만남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함으로 예수님의 제자공동체에 합류하게된 마태오입니다. 

 

이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 보통 공동체가 아닙니다. 모든 차별이 철폐된 만인평등의 형제애의 하늘 나라 꿈의 공동체입니다. 정말 예수님이야말로 혁명적 발상의 전환을 이룬 영적 혁명가임을 깨닫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겠나 짐작이 갑니다. 이런 예수님의 하늘 나라 공동체 꿈이 교회를 통해 수도회를 통해 실현되고 있습니다.

 

당시 세리는 모두에게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며 무시당하는 직업에 속했습니다. 부정 착복한 세금으로 인해 부자였을지 몰라도 이웃과 고립단절된 참 외로운 삶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선입견이나 편견을 넘어 세리의 진심을, 주님을 찾는 순수한 열망을 첫눈에 알아 채셨고 부르셨음이 분명합니다. 다음 예수님 말씀이 오늘 복음의 백미입니다. 우리 성소의 의미가 환히 드러납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참으로 우리를 무한히 겸허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 부르심의 성소는 순전히 주님 자비의 은총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조금 깊이 들여다보면 병자 아닌 사람, 죄인 아닌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잘 나서 부른 것이 아니라 병자요 죄인이기에 부르셨고 이에 응답한 우리들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때 주님과의 은혜로운 만남입니다. 주님과 은혜로운 만남을 통한 회개와 용서, 치유의 구원, 자기 발견의 겸손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나를 따라라” 한 두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평생 늘 새롭게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과 늘 새로운 만남입니다. 이래야 늘 푸르른 건강한 영혼의 삶이겠습니다. 그러니 우리 삶의 여정은 ‘따름의 여정’이요 동시에 예수님을 닮아 참내가 되어가는 ‘예닮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창세기 제1독서는 흡사 아브라함 평전을 읽는 느낌입니다. 예수님 이전의 이야기이지만 참으로 한결같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충실했던 하느님의 벗 아브라함입니다. 하느님 은총의 축복으로 점철된 아브라함의 평생 삶입니다. 그대로 우리 삶을 비춰주는 거울같습니다. 산전수전, 파란만장한 삶의 한복판에서 늘 하느님과 깊은 친교의 만남중에 평생을 한결같이 새롭게 살았던 일상의 평범한 신비가 아브라함입니다. 다음 짧은 한 구절이 깊은 울림을 줍니다. 그대로 아브라함의 평생 삶을 요약합니다.

 

‘아브라함은 이제 늙고 나이가 무척 많았다. 주님께서는 모든 일마다 아브라함에게 복을 내려 주셨다.’

 

'참 곱게 늙었구나!' 부러운 생각까지 드는 아브라함입니다. 그대로 한결같이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우리 하는 모든 일마다 우리에게 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을 따르는 축복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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