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나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2024.6.16.연중 제11주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Jun 16,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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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6.16.연중 제11주일                                                     에제17,22-24  2코린5,6-10 마르4,25-34

 

 

하느님의 나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좋으니이다 지존하신 님이시여,

 주님을 기려 높임이,

 그 이름 노래함이 좋으니이다.”(시편92,2)

 

언젠가 말씀드렸다시피 일기쓰듯 쓰는 강론입니다. 1989년 7월 11일, 사제서품후 2024년 6월16일 오늘까지 매일 써오는 강론이기에 좀 자유롭고 싶습니다. 첩첩산중(疊疊山中), 날마다 산을 넘는 듯 매일 써도 처음 쓰는 듯 힘든 강론이지만 ‘살기 위해’, ‘더불어 살기 위해’ 씁니다. 한 밤중 일어나 맨먼저 하는 일은 만세칠창후 교황님 홈페이지를 확인하는 일입니다. 얼마나 많은 세계 각계 각층의 사람들을 만나는지 전무후무(前無後無), 유일무이(唯一無二)한 분일 것입니다.

 

“인공지능은 객관적이지도 중립적이도 않다.”

며칠전 이태리에서 열렸던 ‘주요 7개국 정상회담(G7)’에서 하신 연설의 요지입니다. 인공지능에 경각심을 촉구하는 지혜와 통찰로 가득한 내용들입니다. 일곱정상들 한가운데 위치한 교황님의 사진 모습을 보면서 명실공히 정신적 세계 대통령임을 깨닫게 됩니다.

“더 좋은 세상을 꿈꾸도록 우리를 도와 주십시오.”

세계 각처에서 바티킨의 교황님을 찾은 100여명의 코미디언들에게 하신 연설의 요지입니다.

“자선활동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역시 어제 교황님을 방문한 사업체 지도자들에게 하신 연설의 요지입니다. 자선활동은 물론이요, 환경, 가난한 이들, 젊은이들에 대해서도 폭넓은 시야와 관심과 도움을 촉구하는 내용입니다. 

 

오늘 만나는 옛 어른의 말씀도 분발의 용기를 줍니다.

“거듭 천 번을 할 수 있는 사람에게 단지 필요한 것은 타고난 능력이 아니라, 과감히 도전할 수 있는 용기이다.”<다산>

“다른 사람이 한 번에 할 수 있다면, 나는 백 번을 하고, 열 번에 할 수 있다면 나는 천 번을 한다.”<중용; 공자의 손자인 자사가 쓴 책으로 논어, 대학, 맹자와 더불어 사서에 속합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이런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음은 일상의 삶은 물론 고전을 치열히 폭넓게 섭렵하면서 반추한 결과임을 깨닫게 됩니다. 목숨을 걸고 공부에 매진했던 다산같습니다.

 

“늙음은 온갖 불편의 집합이다. 마지막으로 정리할 게 무엇인가 생각할 때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도 아침에 해가 뜨고 아파트 발코니에선 꽃들이 피고 지고 있다. 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시, 물빛으로 환한 시간이.”

 

87세 황동규 노시인의 고백입니다. 참으로 폭넓게 펼쳐지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 다양한 예를 통해 나눴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 이 자리에 계신 ‘영원한 현재’의 하느님이십니다. 눈만 열리면 하느님의 현존이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제 애송하는 자작시 내용 그대로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 사랑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느님의 나라 천국이옵니다.”

 

교회는 단지 하느님 나라의 표지이자 성사일뿐 하느님의 나라는 교회를 뛰어 넘어 시공을 초월하여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바로 이 평범하면서도 놀라운 진리를 보여준 분이 오늘 복음의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를 통해 하느님 나라의 실상을 보여줍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 되는지 모른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발견되는 하느님 나라의 표지들입니다. 쉬지 않고, 끊임없이, 소리없이 일하시는 하느님입니다. 바로 언제 어디서나 오늘 지금 여기 이 자리에서 펼쳐지는 하느님의 나라임을 깨닫습니다. 죽어서 가는 하느님의 나라도 아니고 어디 밖에 있는 별세계같은 하느님의 나라도 아닙니다. 바로 지금 여기서 펼쳐지는 하느님의 나라를 놔두고 밖에서 하느님의 나라는 찾는 이들이야말로 어리석은 사람들이요 끝내 찾지 못할 것입니다. 

 

어디나 하느님 계신 성지인데, 오늘 지금 여기 성지를 놔두고 성지순례를 떠날 필요가 어디 있겠는지요. 바로 제자리가 하느님의 나라임을 알게 함이 성지순례의 궁극적 목표일 것입니다. 어떻게 하느님의 나라를 살 수 있겠는지요? 신망애(信望愛), 믿음, 희망, 사랑의 삶을 통해서입니다. 

 

첫째, 믿음의 삶입니다.

하느님을 믿을 때, 펼쳐지는 하느님의 나라를 봅니다. 내 시각으로 볼 때 문제투성이지 하느님의 눈으로 볼 때는 너무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할 일은 믿음의 눈으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깨달아 아는 것이요 기꺼히 받아드려 충실히 살아내는 것입니다. 제1독서의 에제키엘 예언자가 그 모범입니다. 이미 그 예전에 믿음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살았던 분입니다.

 

“내가 손수 높은 향백나무의 꼭대기에 순을 따서 심으리라...온갖 새들이 그 아래 깃들이고, 온갖 날짐승이 그 가지 그늘에 깃들이리라.”

 

믿음의 눈으로 볼 때 이런 향백나무같은 개인이, 공동체가 눈에 보이는 하느님 나라 꿈의 실현입니다. 또한 믿음의 사람들은 하느님의 섭리안에 펼쳐지는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제야 들의 모든 나무가 알게 되리라. 높은 나무는 낮추고, 낮은 나무는 높이며, 푸른 나무는 시들게 하고, 시든 나무는 무성하게 하는 이가, 나 주님임을 알게 되리라. 나 주님은 말하고 실천한다.”

 

참으로 믿음의 눈으로, 하느님의 눈으로 매사 펼쳐지는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깊이 드려다 봐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몰라서 원망, 절망, 실망이지 믿음의 눈으로 보면 하느님 하시는 일에 감사, 감동, 감탄이 뒤따를 것이며, 매사 진실, 성실, 절실한 자세로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둘째, 희망의 삶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사람들은 희망의 여정을 살아가는 희망의 순례자들입니다. 하느님께, 하느님의 나라가 궁극의 꿈이자 비전이자 희망인 자들은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의 나라를 삽니다. 그 빛나는 모범이 바오로 사도요 그의 고백이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용기를 줍니다.

 

“우리가 이 몸 안에 사는 동안에는 주님에게서 떠나 살고 있음을 알면서도, 우리는 언제나 확신에 차 있습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확신에 차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몸을 떠나 주님 곁에 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함께 살든지 떠나 살든지 우리는 주님 마음에 들고자 애씁니다.”

 

믿음과 희망이 함께 감을 봅니다. 바로 이런 주님이 우리의 궁극의 희망입니다. 이런 주님을 늘 그리워하고 바라보기에 희망이 샘솟고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를 앞당겨 살게 됩니다. 늘 희망의 주님께 시선을 두면서 주님 마음에 들고자 애씁니다. 

 

셋째, 사랑의 삶입니다.

하느님 사랑에 눈이 열릴 때 보이는 하느님 나라의 현실입니다. 예수님 사랑의 눈에 포착된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입니다. 하느님이 주도권을 잡고 소리없이 묵묵히 펼쳐가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가만히 바라보고 지켜보며 참으로 필요할 때 협조해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하느님 섭리의 손 안에 있음을 봅니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 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 나라의 순리이자 섭리입니다. 심는 분도 주님이요 거두는 분도 주님입니다. 하느님 섭리의 손을 벗어날 수 없는 우리들이요 이래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섭리를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겨자씨의 비유도 그대로 하느님 나라의 전개과정을 상징합니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그 작았던 요셉 수도원이 이제는 큰 숲이 되어 많은 이들의 사랑의 쉼터, 치유의 쉼터가 되고 있으니 그대로 하느님 나라 공동체를 상징합니다. 사랑의 하느님 나라 공동체를 이뤄주는 성전에서의 사랑의 성사(聖事)요, 식당에서의 사랑의 식사(食事)요, 배밭 농장에서의 사랑의 농사(農事)이니, 바로 ‘사랑의 삼사(三事)’입니다. 

 

배농사를 보면 하느님 나라의 실현에 사람의 적절한 도움도 필수임을 깨닫습니다. 배농사의 80%는 하느님 몫이고 나머지 20% 사람몫인 가지치기, 잡초깎기, 거름주기, 농약치기, 적과하기, 봉지싸기 등 농부 수도자의 시기적절한 협조도 필수입니다. 사랑의 기도와 사랑의 노력이 함께 가야합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요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입니다. 하느님 나라 꿈의 실현에 100% 하느님 손에 달린 듯이 기도하고, 100% 내 손에 달린 듯이 노력하는 일이 얼마나 본질적이고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펼쳐지고 있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내가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내 몸담고 살아가는 공동체가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참으로 겸손하고 성실한 하느님 사랑의, 섭리의, 순리의 도구와 협조자가 되어 신망애의 참 좋은 하느님의 나라를 살게 하십니다. 

 

“하느님 집안에 심어진 그들은, 

 하느님의 뜰에서 꽃피리이다.

 의인은 늙어서도 열매 맺고, 물이 올라 싱싱하리라.”(시편92,13-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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