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6.18.연중 제11주간 화요일 1열왕21,17-29 마태5,43-48
원수를 사랑하여라
“하닮의 여정”
“하늘 보면
마음은
훨훨 날아
흰구름 된다”
요즘 눈에 자주 띄는 푸른 하늘에 흰구름을 볼 때 마다 떠오르는 제 짧은 자작시입니다. 누구나에 공통된 하늘 같은 하느님 안에 살고 싶은 갈망의 표현입니다. 몇가지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웬만한 책들은 도서실로 보내지만 감명깊었던, 두고두고 보고 싶은 책들은 방에나 집무실에 보관합니다.
‘메르켈 리더십’이 그런책입니다. 독일의 제8대 연방총리로 2005년부터 2021년까지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로 무려 16년간 재임했던 분인데 퇴임후로는 일체 나타나지 않는 사실도 참 놀랍고 멋집니다. 재임중에 세계적인 지도자로 명성을 떨친 분입니다. 다큐멘터리 같은 책, ‘메르켈 리더십’의 마지막 문장도 잊지 못합니다.
‘언젠가 역사책에서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기를 바라는 지 묻는 질문에 앙겔라 메르켈은 이렇게 답했다. “그는 노력했다(She tried).” 선동 정치가 판치는 시대에 앙겔라 메르켈은 자신의 묘비명으로 “겸손과 품위”를 선택했다. 이 사실이 메르켈을 대변하고 있다.’
알베르크 슈바이처가 쓴 바흐 전기에서 다음같은 문답도 잊지 못합니다. 슈바이처가 묻고 바흐가 대답합니다.
“어떻게 자기 예술을 그렇게 완벽하게 해낼수 있습니까?”
“나는 일을 열심히 합니다. 누구나 열심히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다산의 말씀도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삶의 격을 높이는 것은 지위나 신분이 아니라 ‘부지런함’이다.”
“어찌하면 뭉툭한 것을 뚫을 수 있는지 묻자 부지런하라 하셨다.
어찌하면 막힌 것을 트이게 하는지 묻자 부지런하라 하셨다.
어찌하면 거친 것을 연마할 수 있는지 묻자 부지런하라 하셨다.”<다산의 삼근계三勤戒>
그 어느 분야든 일가를 이룬 참 반듯한 천재의 특징은 “부지런한 천재, 노력하는 천재”임을 깨닫습니다. 상담고백성사를 주다 보면 참으로 죄를 찾아보기 힘든 한결같이 성실한 분들도 간혹 만납니다. 이런 참 좋은 성인같은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어제에 이어 오늘 제1독서의 아합 왕과 그의 아내 이제벨이 있습니다.
감쪽같이 합법적으로 자행한 아합과 이제벨 합작품의 완전범죄와 같은 나봇의 살인에 대한 사실이 폭로되는 오늘의 제1독서 장면은 흡사 지옥의 심판을 연상케 합니다. 하느님 앞에, 하느님 눈에 완전범죄는 없습니다. 노자도덕경에 나오는 천망회회 소이불실(天網恢恢 疎而不失), 천지 자연의 법칙은 광대하여 엉성한 듯 보이지만, 악인에게 벌을 주는 일을 빠뜨리지 않는다는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죄의 결과가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는지 충격적입니다. 엘리야를 통한 하느님의 심판이 참으로 단호하고 준열합니다.
“그에게 전하여라. ‘주님이 말한다. 살인을 하고 땅마져 차지하려느냐?’ 그에게 전하여라. ‘주님이 말한다. 개들이 네 피도 핥을 것이다.”
아합에 이어 이제벨에 대한 천벌도 예고됩니다. 사가(史家)의 아합에 대한 평입니다.
“아합처럼 아내 이제벨의 충동질에 넘어가 자신을 팔면서까지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지른 자는 일찍이 없었다. 그는 우상들을 따르며 참으로 역겨운 짓을 저질렀다.”
엘리야의 선언에 회개한 아합에게 당장의 재앙은 보류되지만 그의 아들대에 가서는 에누리 없이 재앙이 있을 것을 예고합니다. 제1독서가 지옥도를 연상케 한다면, 오늘 복음은 천국도를 연상케 할 정도로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참으로 하느님 주신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제몫의 사명을 수행하며, 사랑하며 살기만으로도 턱없이 짧은 세상인데 도대체 죄를 지을 시간이 어디 있겠는지요!
제 아무리 열심히 살았다 해도 더욱 사랑하지 못했음에 대한, 더욱 최선을 다하지 못했음에 대한 회한뿐이기에 남는 기도문은 “주님,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자비송 하나 뿐일 것입니다. 삶은 선물이자 과제입니다. 하루하루가 '다시 한 번 잘 살아보라'고 하느님 친히 내리시는 선물입니다. 회개한 이들의 과거는 불문에 붙이시고 지금부터의 삶을 보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니 단호한 결의와 선택으로 바로 지상천국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도대체 죄를 지을 시간이 어디 있겠는지요!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라”는 베네딕도 성인의 말씀이 가슴을 칩니다. 답은 하나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마지막 주님의 제6 대당명제인 “원수를 사랑하라”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하늘 아버지의 마음을 그대로 전하는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입니다. 원수에 대한 최고의 보복은 사랑뿐이요, 박해자에 대한 최고의 보복은 기도뿐입니다. 원수를 좋아하라 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라 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 아가페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기본적 연민과 존중의 사랑입니다. 우리 눈에 원수와 박해자이지 하느님 눈엔 다를 수 있습니다.
원수와 박해자에게도 자기탓이 아닌 그만의 고유한 사정이 원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무지의 악의 희생자일수도 있고 우리가 모르는 사실도 참 많을 수 있습니다. 무지에 기인한 고정관념, 편견, 선입견, 오해와 착각의 왜곡된 시선이나 생각으로 진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경우도 참 많을 것입니다.
그러니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하느님을 닮아, 끼리끼리 유유상종(類類相從)의 편협한 이기적 사랑을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성사(聖事)인 교회에 속한 우리들은 결코 동호회원들이나 친목회원들이 될 수는 없습니다. 생명있는 모든 존재가 살 권리가 있는 하느님 사랑의 대상들이요 종파를 초월해 모든 인류가 하느님의 한가족임을 통절히 깨닫는 다면 전쟁의 악은 도저히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난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 그러니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바로 예수님처럼 이런 하느님을 닮아가는 것은 우리의 선물인생에 부여된 평생숙제입니다. 하느님의 기대수준은 이렇듯 높습니다. 이런 평생숙제를 목전에 둔 우리들인데, 평생 기도하고, 공부하고, 사랑하고, 일하기에도 턱없이 짧은 인생들인데, 또 인생 후반에는 병마와의 싸움인데, 도대체 죄지을 시간이, 세상 헛된 일들에 낭비할 시간이 어디 있겠는지요!
여기서 사랑의 완전함(perfectin)이란 대자대비하신 그분을 닮은 사랑의 너그러움(generosity), 온전함(wholeness)을 뜻합니다. 말그대로 둥근 마음, 둥근 삶의 둥근 사랑입니다. 어제 문화영성대학원 전례 강의 중인 원장수사와 주고 받은 문자 메시지도 소개합니다.
“오늘 강의 주제는 십자가입니다. 오늘로 종강입니다.”
“종강! 축하드립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영적승리의 삶을 상징하는 1학기 강의였네요!”
마지막 강의 주제가 '십자가'라니 참 적절하다 싶었습니다. 모두가 주님 십자가의 사랑으로 수렴되며 주님 십자가의 사랑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사랑의 하느님을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하느님, 우리를 어여삐 여기소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옵소서.
어지신 그 얼굴을 우리에게 돌이키소서."(시편67,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