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2.4.연중 제4주간 월요일                                                                         히브11,32-40 마르5,1-20

 

 

 

참 사람이 되는 길

-주님 중심의 신망애信望愛의 연대連帶의 강화와 심화-

 

 

 

“주님께 희망을 두는 모든 이들아, 마음을 굳게 가져라.”

오늘 미사중 화답송 후렴입니다. 주님께 희망을 둘 때, 중심을 둘 때 마음 굳건한 삶이요 안정과 평화입니다. 주님 희망을, 주님 중심을 잃어 버릴 때 십중팔구 더러운 영에 들립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게라사의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고치신 구마사화입니다.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에 대한 묘사가 너무 무시무시합니다. 사람이 공동체로부터 고립단절되어 괴물이 될 때 누구나의 가능성입니다.

 

‘그는 무덤에서 살았는데, 어느 누구도 더 이상 그를 쇠사슬로 묶어 둘 수가 없었다. 이미 여러 번 족쇄와 쇠사슬로 묶어 두었으나, 그는 쇠사슬도 끊고 족쇄도 부수어 버려 아무도 그를 휘어 잡을 수 없었다. 그는 밤낮으로 무덤과 산에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치곤 하였다.’

 

비정한 사회에 대한 고발처럼 보입니다. 사람이 언어를 잃고 괴성을 지르며 자해하는 괴물로 변한 모습입니다. 이런 이들이 있는 한 우리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지금도 이처럼 어디선가 공동체로부터 격리되어 울부짖고 있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정신장애인들에 대해서는 사회나 국가가 책임을 지고 돌 보아야 할 것입니다. 복음 묵상 중 떠오른 단상입니다.

 

-왜/이렇게 불안할까/이리 썰렁할까

 사람은 참 약하다/사람은 다 똑같다

 사랑받고 사랑하고 싶은 거다/신뢰받고 존중받고 싶은 거다

 나도 나를 안다/고립단절의 혼자가 지옥이다/십중팔구 괴물된다

 이웃이 하늘이다/이웃이 선물이다/이웃이 구원이다/사랑이 답이다/연대의 사랑이다

 이어지면 살고/끊어지면 죽는다

 잘했든 못했든/맞았든 틀렸든

 누군가 하나라도/무조건 나를/지지해 줬으면/받아 줬으면

 사랑해 줬으면 좋겠다-

 

저절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이 주님의 중심의 삶입니다. 삶의 중심을 잃어 버릴 때, 삶의 중심이 없을 때, 더러운 영이 그 중심을 차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삶의 중심은 물론 공동체 역시 그 중심에 살아 계신 주님을 모셔야 합(삽)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이에 대한 답은 주 예수님뿐입니다. 

 

마귀들린 이와 예수님의 만남이 극적입니다. 예수님의 신원을 알아 챈 마귀들린 사람은 예수님 앞에 엎드려 절합니다. 마치 주님의 빛 앞에 숨어 있을 수 없자 뛰쳐 나온 마귀의 고백처럼 들립니다. 이미 하느님의 아드님의 지배가 거역할 수 없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네 이름이 무엇이냐?”

 “제 이름은 군대입니다. 저희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앞에 마귀는 자기의 정체를 밝힙니다. 여기서 ‘군대’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레기온이고, 라틴 말로는 레지오입니다. 로마 제국의 레지오는 약 6000명의 군사로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수가 많은 군대라 함은 그 마귀들린 정도가 심각함을 의미합니다. 이 마귀를 내쫓는 이야기는 병을 고치는 범위를 넘어, 사탄의 왕국에 대한 예수님의 승리를 보여줍니다.

 

더러운 영들은 예수님의 허락에 따라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고 돼지떼들은 모두 호수에 빠져 익사하고 맙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더러운 짐승으로 여기는 돼지가 있다는 것은 이교인들이 사는 땅의 더러움을 뜻합니다. 마침내 돼지들의 익사는 이 고장에 대한 마귀들의 권세가 끝났음을, 또 그곳이 더러움에서 해방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강론을 쓰는 새벽시간 휴대폰을 켜니-“(미세미세)남양주시 별내동;최고 좋음-공기상태 최고! 건강하세요!”- 문자가 뜹니다. 주님을 중심에 모실 때 우리 영혼 공기의 상태도 이럴 것입니다.

 

더러운 영들에 대한 답은, 마귀떼들에 대한 답은 주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요즘 사회전체의 혼란상이 흡사 제정신을, 중심을 잃고 마귀들린 사람들로, 미친 사람들(?)로 가득한 세상 같습니다. 

 

탐욕, 교만, 허영, 거짓, 나태, 음욕, 탐식, 분노, 원한, 증오, 절망, 무지, 무례, 분열, 불화, 불신, 비방, 모함, 무수한 가짜 뉴스, 험악한 댓글 등 참으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마귀들입니다. 마귀의 도구가 되었는데도 알아 채지 못하는 참 딱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셔야 비로소 더러운 영들은 퇴치되고 비로소 제정신으로 살 수 있습니다.

 

마귀들린 이는 주님을 만나 삶의 중심을 회복하고 치유되어 제정신을 찾자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사 청합니다만 예수님은 허락하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셔도 따르는 길은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

 

그는 물러가 제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해 주신 모든 일을 선포함으로 주님을 따릅니다. 마귀들린 자가 복음 선포자가 되었으니 놀라운 은총입니다. 이제 주님을 중심으로 제 삶의 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게 된 사람입니다. 새삼 사람이 되는 길은 주님을 중심으로 사랑의 연대가 이뤄질 때 가능함을 봅니다.

 

유비무환입니다. 치유보다는 예방이 백배 낫습니다. 주님 중심이 없으며, 주님 중심을 잃으면 그 삶의 중심에는 어김없이 더러운 영들이, 우상들이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러니 그 무엇보다 주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주님 중심의 삶일 때 회개와 겸손이요 영육의 건강이요 사랑의 연대 공동체입니다. 

 

고립단절의 혼자보다 위험한 경우도 없습니다. 삶의 중심인, 공동체 삶의 중심인 주님을 잃는 것보다 큰 재앙은 없습니다. 개인이나 공동체는 십중팔구 더러운 영들의, 마귀들이 놀이터가 됩니다. 요즘 사회상을 보면 악마들의, 마귀들의 놀이터가 된 듯합니다. 참으로 교회의 복음 선포의 사명이 절실합니다. 사회교리를 강화할 필요성이 절실합니다.

 

하여 사랑의 연대, 믿음의 연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믿음은 혼자가 아닙니다. 교회공동체와 연대해 있는 믿음이요 희망이요 사랑입니다. 바로 제1독서 히브리서는 믿음의 연대에 대해 말합니다. 

 

“이들은 모두 믿음으로 인정을 받기는 하였지만 약속된 것을 얻지는 못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내다보셨기 때문에, 우리 없이 그들만 완전하게 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마침내 더 좋은 약속된 것을 예수님을 통해서 얻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내 삶의 중심에, 공동체의 중심에 모시고 사랑의 연대의 삶을, 믿음의 연대의 삶을, 희망의 연대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사탄의 시스템에서 벗어나 하느님 나라의 시스템을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삶 자체가 교회의 사명이요, 최고의 복음 선포요, 악령퇴치는 물론 악령침입에 대한 최고의 처방입니다.

 

새삼 교회가 끊임없이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공동시편전례기도와 공동미사전례기도가 복음 선포는 물론 삶의 연대와 중심을 강화하고 심화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깨닫습니다. 교회의 모두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안에 내재한 어둠의 세력을 일소시켜 주시며, 주님 중심으로 믿음의 연대, 희망의 연대, 사랑의 연대, 즉 ‘신망애信望愛의 연대’를 강화强化, 심화深化해 주십니다. 아멘

 

  • ?
    고안젤로 2019.02.04 09:24
    제가 가지고 있는 pc가 바이러스에 침투하지 못하도록 매일 체크 하여 안심하고
    인터넷 뱅킹을 할 수 있듯이
    세상속 삶속에서 주님 주신 제 영혼을 지키고자 매일 주시는 말씀을 통해 철벽 보안으로 주님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하느님 사랑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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