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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6.26. 연중 제13주일                                                 열왕기19,16ㄴ.19-21 갈라5,1.13-18 루카9,51-62


                                                                        -오, 자유인(自由人)!-

                                                                        - 자유의 여정(旅程)-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희랍인 조르바'의 저자, 그 유명한 그리스인 니코스카잔스키스의 묘비명입니다. 과연 여러분의 묘비명을 정한다면 무엇으로 하겠습니까? 피정지도를 하면서 꼭 부여하고 나누는 과제가 묘비명입니다. 묘비명은 그대로 내 삶의 좌우명이 되고 삶의 지표가 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평생 자유를 갈구했던 니코스카잔스키스요 누구나 갈망하는 자유입니다. ‘나는 자유다.’ 말을 바꾸어 ‘인간은 자유다.’라 정의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닮아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뜻합니다. 


자유로울 때 행복합니다. 여러분은 과연 자유롭습니까? 살아갈수록 자유롭습니까? 오늘은 참 자유인으로 살 수 있는 길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결론하여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제자로 불림받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를수록 깊어지는 사랑의 관계와 더불어 자유로워지는 삶입니다. 하여 우리 삶은 그대로 자유의 여정이 됩니다.


첫째, 이탈의 삶입니다. 

자유의 여정은 이탈의 여정, 비움의 여정, 버림의 여정, 떠남의 여정입니다. 막연한 목표없는 떠남이 아닙니다. ‘버리고 떠남’이 아니라 ‘버리고 주님을 따름’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세 경우의 사람에 대한 반응에서 주님을 따르는 일이 바로 이탈의 삶임을 봅니다.


1.-어떤 사람;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예수님;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마태오와 마르코와 달리 루카는 예수님께서는 당신이나 당신 일행의 집에 계시는 것을 한 번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집이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과연 이런 나를 따를 수 있겠느냐 에둘러 거절하는 예수님이십니다. 참으로 정처定處가 없으셨던, 하느님만이 그분의 유일한 정처이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주님은 과연 우리가 이런 철저한 무소유의 삶을, 이탈의 삶을 살 수 있는가 묻습니다.


2.-예수님; “나를 따라라.”

다른 사람;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예수님;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두 번째 경우는 예수님이 적극적으로 추종을 명령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알리는 일이 얼마나 절박한 일임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오늘 루카복음의 서두 말씀이 그 절박한 분위기를 짐작하게 합니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 승천의 자리입니다. 바로 예루살렘의 여정은 예수님께는 하늘길의 여정입니다. 이런 종말론적 분위기에서는 주님을 따라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일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3.-또 다른 사람;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예수님;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평생목표이자 평생비전이었습니다. 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하느님의 나라를 사셨던 주님이시기에 이미 떠난 과거에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지 않으십니다.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부모와의 작별인사를 허락했는데 예수님은 단호히 허락지 않습니다. 바로 엘리야와 주님이신 예수님의 차이입니다. 


이 세 경우의 일화가 날로 속화(俗化)되어가는 오늘의 우리 믿는 이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줍니다. 우리의 수행(修行) 자세를 다시 살펴보게 됩니다. 철저한 이탈의 삶이 있어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비정(非情)한 분이셨을까요? 아닙니다, 피상적 단견일뿐 예수님은 우리가 임박한 하느님 나라의 종말론적 분위기에 맞게 하루하루 깨어 충실히 살기를 바라십니다.


둘째, 자유의 삶입니다.

강론 서두의 니코스카잔스키스의 절규에 대한 답을 바오로가 줍니다. 니코스카잔스키스가 예수님을, 또는 바오로를 만났더라면 분명 자유에 대한 답을 찾았을 것입니다. 영원한 갈망은 그리스도를 만날 때 비로소 해갈(解渴)됩니다. 이탈의 삶도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자유를 목표로 합니다. 무엇에도 매임이 없는 대자유인 바오로입니다. 바오로의 말씀이 참으로 고맙습니다.


“형제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그리스도는 우리의 자유이십니다. 그리스도 아닌 어디에서도 자유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떠나면 세상 종살이의 멍에를 메고 맙니다. 굳거히 서서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않도록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살아가야 합니다. 


어제 써놓은 ‘하늘로 활짝 열린’이란 시가 문득 생각납니다. 하늘 향해 쭉쭉 뻗은 메타세콰이어 가로수 큰 나무들이 시원스러워 보였는데 순간 하늘을 가린 모습이 답답해 보였습니다. 


-시원했으나/곧 답답해졌다

큰 나무 그늘!/때문이다

하늘을/가려버렸다

그늘을 얻으니/하늘 전망을 잃었다

사면팔방/하늘로 활짝 열린

산되어/사막이 되어/자유가 되어 살고 싶다-


주 그리스도는 큰 나무 그늘이 아니라 하늘입니다. 활짝 열린 자유의 하늘입니다. 이런 하늘이신 주님을 가리지 않는 게 사랑입니다. 하늘이신 주님을 환히 드러내는 게 사랑입니다. 하늘이신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자유입니다.


셋째, 사랑의 삶입니다.

자유가 궁극 목표가 아닙니다. 사랑의 섬김이 궁극의 목표입니다. 자유롭게 하는 사랑, 섬기는 사랑입니다. 이래야 방황이나 방종이 아닌 참 자유로운 삶입니다. 세상으로부터의 자유가 주님을 향한 자유가 될 때 비로소 자유의 완성입니다. 바오로가 결정적 답을 줍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자유롭게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다만 그 자유를 육을 위하는 구실로 삼지 마십시오, 오히려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사실 모든 율법은 한 계명으로 요약됩니다.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하신 계명입니다.”(갈라5,13-14).


사랑으로 서로 섬기기 위한 자유입니다. 예수님을 맞아 들이지 않는 사마리아인들을 하늘에서 불을 내려 불살라 버리지 않겠느냐는 다혈질의 야고보와 요한 제자를 준열히 꾸짖으시는 주님에게서 우리는 사랑을 배웁니다. 


사랑은 성령입니다. 사랑의 삶은 성령의 인도에 따른 삶입니다. 그러니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육의 욕망을 채우지 않게 될 것입니다.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 그러니 성령의 인도를 받을 때 정녕 자유로운 삶, 사랑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은 연중 제13주일 우리 모두 참 자유인이 되어 살 수 있는 길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스승이자 주님을 따라, 

1.이탈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2.자유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3.사랑으로 섬기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종의 멍에를 벗어 버리고 참 자유인으로 굳건히 서서 살게 하십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시편103,1).

끊임없이 바치는 사랑의 주님 찬미가 우리 영혼을 참으로 자유롭게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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