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無知와 망각忘却의 병 -사람은 섬이 아니다-2016.6.28. 화요일 성 이레네오 주교 순교자(130-200) 기념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Jun 28, 2016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2016.6.28. 화요일 성 이레네오 주교 순교자(130-200) 기념일

                                                                                                                 아모3,1-8;4,11-12 마태8,23-27


                                                                 무지無知와 망각忘却의 병

                                                                    -사람은 섬이 아니다-


오늘 6.28일 강론은 하루 전 6.27일 하늘 안 비행기에서 씁니다. 서울에서 뮌헨까지 8시간 58분을 남겨놓고 있는, 강론 쓰기 시작한 지금 시간은 한국 시간 오후 2시, 중국 하늘에서 노트북에 쓰고 있습니다. 벌써 다섯 번째 하늘 안 비행기에서 쓰는 강론입니다. 이런저런 묵상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1.저희 수도승들은 어디서나 하느님을 찾는 여정의 구도자요 수행자입니다. 어디서나 하느님 앞에서의 삶입니다. 제 이런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 아마 비행중일 것입니다. 저는 늘 비행기를 탈 때 마다 좌석 앞 화면의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보는 것을 즐깁니다. 푸른 하늘에 녹색 산야를 배경으로 고공비행하는 비행기의 우아優雅한 모습이 참 맑고 시원한, 한 폭의 살아있는 그림같습니다.


늘 볼 때마다 지루하기는커녕 새롭고 흥미진진합니다. 그 먼 목적지를 향해 막막한 창공을 나는 비행기가 흡사 하느님을 찾는 수도승을 보는 듯 합니다. 하늘 안 고독 중에도 한결같이 항구히 충실히 제 길을 가는 비행기를 보노라면 참 신기하고 장해 저절로 박수를 쳐주고 싶은 심정입니다.


2.저는 태생적으로 정주의 수도승 같습니다. 늘 주어진 그 자리에서 하느님을 찾는 내적여정만으로 충분하기에 외적여정에는 거의 흥미를 잃어 아예 어디 갈 생각을 안합니다. 사실 나이들면 갈곳도, 만날 사람도 점점 줄어들다가 주님만 남기 마련입니다. 얼마전 원장수사와 대화중 원장 수사의 비유가 재미있었습니다.


“수사님이 바위라면 저는 생고무입니다. 저는 아무리 당겨도 찢어지지 않으며 눌러도 곧 튀어나올 정도로 탄력이 좋은 생고무입니다.”


참 비유가 적확했습니다. 탄력좋은 생고무의 영성도 정말 바람직합니다. 성향의 차이입니다. 생고무의 영성을 이해하지만 나의 경우는 정주의 바위가 좋습니다. 하여 성철스님의 좌우명 종신불퇴終身不退는 제 좌우명이기도 합니다. 하여 ‘몸이 다할 지언정 결코 물러나지 않는다.’ 전사戰死해야 전사戰士라는 제 소신과도 일치합니다.


종신불퇴의 영성으로 29년째 배수진을 치고 불암산이 되어 요셉수도원에 정주중입니다. 하여 오래 전 수도원을 떠나고 싶은 유혹이 들었을 때 단언한 “불암산이 떠나면 떠났지 나는 안 떠난다.” 라는 말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습니다. 


제 사랑하는 말마디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번 수도원 순례여정은 예외입니다. 뜻밖에 선물로 주어졌고, 하느님을 찾는 여정에 큰 보탬이 되리라는 예감에 약간 마음은 흥분상태입니다.


원장수사의 재치가 빛나는 대목을 소개합니다. 며칠전 원장수사가 집무실을 숲 가운데 콘테이너로 옮겼습니다. 흡사 고故 선종완 신부님의 은수처와 토마스 머튼의 은수처와 비슷한 느낌이 들고 언뜻 부러움조차 들었습니다.


“집무실이 은수처 같습니다.”

“아닙니다. 은수처는 저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은수처隱修處가 아니라 은신처隱身處입니다.”


겸양의 말로 들렸습니다. 참 재미난 비유입니다. 밖으로는 은신처로 보이겠지만 안으로는 주님을 만나는 고독과 기도의 은수처가 수도승의 방입니다. 


3.마음은 여전히 젊음인데 외관상은 그렇지 않은가 봅니다. 전번 50대 초반의 제자들과 만났을 때 대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그랬고, 목욕탕에 잠시 들렸을 때 두말할 것 없이 65세 이상으로 알아서 1000원을 할인해 주었습니다. 오늘도 순례여행차 떠나면서 주변 친지들이 대하는 모습도, 또 공항에서 물건을 구입할 때도 대하는 모습도 그러했습니다. 외관상은 그렇다 해도, 내면은 여전히 독야청청 영원한 청춘의 푸른 솔, 수도승입니다. 내적으로 한없이 깊고 너그럽고 자비로워야겠다는 다짐을 거듭 새로 하게 됩니다.


4.지금은 비행 후 3시간, 비행기는 아직도 중국 상공을 날고 있습니다. 중국을 벗어나면 러시아 하늘을 이어 동유럽의 하늘을 날아 앞으로 7시간 40분 후면 뭰헨에 도착할 것입니다. 모처럼 넉넉한 시간이 마련되어 이러저런 묵상을 나눕니다. 지금 비행기에서 내려다 보는 푸른 하늘에는 흰구름들이 두둥실 떠있습니다. 땅에 살면서도 내적으로는 하느님 하늘을 자유로이 유유자적하는 순수한 마음의 수도승들을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5.오늘 하루 순조로운 출발에 감사했습니다. 새벽 2시에 일어나 ‘귀가준비’라는 강론을 잘 써서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렸고, 이어 수도원 경내 산책하며 기도를 바쳤고, 아침미사후 간단한 아침식사후 여러 수도형제들의 따뜻한 환송(歡送)을 받으며 수도원을 떠났습니다. 


환대歡待는 물론 환송歡送 역시 사랑의 표현임을 깨닫습니다. 좌우간 형제들의 사랑을 마음 속 깊이 감지했습니다. 공항버스까지 태워준 안토니오 수사는 버스가 출발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환송해 주었습니다. 이어 공항에서 만난 코이노니아자매회 형수를 비롯한 수산나 자매님이 시종일관 사랑의 환송을 해줬고 동행중인 뉴튼수도원의 사무엘 원장 신부의 여동생 이레네도 온갖 친절로 대해줬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몰라서 허무虛無의 삶이지 알면 하느님 사랑 안에서 충만充滿한 삶입니다. 삶은 허무가 아니라 사랑의 충만입니다. 사람은 결코 섬이 아닙니다. 지옥이 있다면 고립단절이 지옥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 보면 고립단절은 없고 모두 하느님 사랑 안에서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를 깨닫는 것이 바로 은총의 지혜입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무지無知가, 하느님을 잊는 망각忘却이 정말 영혼의 큰 병이자 재앙입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알고,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기억합니다. 저는 오늘 수도형제들과 자매들의 사랑을 통해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배안의 주님 제자들은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있으면서도 주님을 몰랐고, 주님을 잊었습니다. 무지와 망각이 제자들을 사로잡았습니다.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자 제자들은 혼비백산 제정신을 잃었습니다. 편안히 주무시고 계시는 믿음 충만한 주님과는 너무 대조적입니다. 늘 하느님과 깨어 일치의 삶을 사셨던 예수님이시기에 요지부동,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래도 제자들의 기도는 정말 적절했습니다.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주님, 살려 주십시오.’로 바꿔도 무방합니다. 예전 중환자실에 계신 노신부님을 문병 갔을 때 추억이 생각납니다. 노신부님이 알아들을 수 없는 화살기도를 끊임없이 바치기에 무슨 뜻인가 간병 자매님에게 물었습니다.


“날 살려 줘, 날 살려 줘.”


라는 말의 반복이란 것이었습니다. 당시는 본능적인 욕구의 말마디에 웃었지만 정말 참 좋은 화살기도임을 얼마 지난 후 깨달았습니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영어 말마디, ‘We are lost!’가 더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영적으로 자기를 잃고 죽어가는 익사직전의 사람들도 참 많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꾸지람이 정신 번쩍 나게 합니다. 배 안의 제자들은 물론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예수님이 제자들을 꾸짖을 때 단골 용어입니다. ‘왜 겁을 내느냐?’ 역시 영어가 익살스럽습니다. ‘Where is your courage?’도대체 너희 용기는, 믿음은 어디다 두고 그렇게 호들갑을 떠느냐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주님을 몰랐기에, 주님을 잊었기에 용기도, 믿음도 실종입니다. 마침 오늘 순교기념일을 지내는 이레네오 성인의 잠언을 소개합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 그리스도를 따르라 명령하신다. 우리의 봉사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구원을 주고 싶기 때문이다. 빛을 따르는 것이 빛을 얻는 것처럼, 구원자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구원을 나누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구히 주님을 따를 때 믿음의 성장이요 성숙입니다. 시행착오를 통해 성장 성숙하는 믿음입니다. 애당초 타고난 용기나 믿음은 없습니다. 주님을 만남으로 주님을 알았고, 주님을 기억했고, 이어 자기를 깨달아 알게 된 제자들입니다.


바로 예언자들은 늘 주님을 만나면서 주님 현존 안에 사는 자들입니다. 늘 우리의 망각을 깨우쳐 주님을 알게하고 기억하게 하는 예언자들입니다. 무지와 망각은 바로 영혼의 치명적 병이자 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무지와 망각을 일깨우며 회개를 촉구하는 아모스 예언자의 열화와 같은 말씀입니다.


“정녕 주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 예언자들에게 당신의 비밀을 밝히지 않으시고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신다,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누가 예언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이렇게 하리라. 이스라엘아, 너의 하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여라.”


오늘 지금 여기의 우리가 모두가 ‘이스라엘’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을 맞이하는 우리 모두를 깨우쳐 주시어 당신을 알고 우리 자신을 알게 해 주십니다. 아무쪼록 수도원 순례여정을 통해 좋으신 주님과 더불어 ‘참 나’를 깊이 만나시기 바랍니다.


“나 주님께 바라네. 주님 말씀에 희망을 두네.”(시편130,5참조). 아멘.


-한국시간 2016.6.27. 오후 2시 중국 하늘에서 시작하여, 4시 40분 러시아 하늘에서 6.28일 강론 완료. 하느님께 감사!-





Articles

77 78 79 80 81 82 83 84 85 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