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2.9. 연중 제5주간 월요일(성모영보수녀원 피정 5일째)

                                                                                                                          창세1,1-19 마르6,53-56


                                                                  귀향(歸鄕:coming home)의 여정


고향을 찾는 마음은 하느님을 찾는 마음입니다. 하느님이 참 고향이자 본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하느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에 닿아있습니다. 사실 살아갈수록 '찾아갈 곳'은, '찾아갈 분'은 하느님 한분 뿐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이 우리 마음에 심어주신 '영원한 그리움의 향수(鄕愁:homesick)'입니다. 


하여 어쩔수 없이 사람은 누구나 '고향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homesick at home) 역설적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여기가 고향이 아니라 하느님이 고향이자 본향임을 말해 줍니다.


"기쁨과 평화 넘치는 하느님 계신 곳, 언제나 마음속에 그리며 살리라.

우리의 모든 소망 이뤄지는 그곳, 영원한 천상 행복 누리게 하소서.“


믿는 이의 근원적 소망의 표현과도 같은 성가68장입니다. 세상에 이방인이요 나그네임을 말해 줍니다. 바로 이런 우리의 심중을 반영하는 히브리서의 고백이 고맙습니다.


'이들은 모두 믿음 속에 죽어갔습니다.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멀리서 그것을 보고 반겼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이 세상에서 이방인이며 나그네일 따름이라고 말함으로써 자기들이 본향을 찾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냈습니다.'(히브11,13-14).


참 은혜롭고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눈에 보이는 고향 대신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의 영원한 고향이자 본향인 하느님께 희망을 두라는 말씀입니다.


40년 전, 초등학교 제자들이 선생님인 저를 발견하고 열광하며 찾는 마음도 바로 이런 향수의 발로입니다. 덧없이 흘러가는 삶에 옛 고향(故鄕) 같은 선생님을 만나고 싶은 겁니다. 이 그리움의 뿌리는 하느님께 닿아 있습니다. 새삼 '하느님의 향수(鄕愁)'를 불러 일으키는, '하느님의 이정표'가 되는, 사제가 정말 이상적 사제임을 깨닫습니다.


"선생님, 날씨가 너무 춥습니다. 친구들이 선생님 빨리 뵙고 싶어하는데 선생님이 정해 주세요. 아님 16일 저녁이 어떠세요?“


지난 밤에 도착한 제자의 카톡메시지입니다. 38년전엔 13살의 초등학교 6학년 제자들이었으나 지금은 51세의 본격적 중년을 넘어선 제자들입니다. 


아무리 나이 들어 할아버지가, 할머니가 되어도 고향은 고향이며 선생님은 선생님이고, 어머니는 어머니이며 하느님은 하느님입니다. '천국 같은 교실' '행복한 교실'을 모토로 하여, 나 하나만이라도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 집이 아닌 가정 같은 교실을 꾸미고자 열정을 다한 청년교사 시절이 그립고 아이들도 그런 고향 같은 선생님을 그리워 찾는 것입니다. 집(house)은 있어도 가정(home)이 없는 오늘의 세태일수록 참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더욱 깊어갈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떠오른 고향(故鄕), 향수(鄕愁), 본향(本鄕), 귀향(歸鄕)이란 한자 '향(鄕)'자가 들어가는 단어 들입니다. 저는 삶을 '귀향의 여정', 즉 우리의 본향인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이라 칭합니다. 죽음을 향한 인생 여정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을 향한 귀향의 여정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아버지인 하느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고향이자 본향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이 계신 곳을 찾지 말고, 하느님을 찾으라.‘

'하느님의 약속을 믿지 말고, 하느님을 믿으라.‘


정곡을 찌른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어디나 계시기에 바로 지금 여기가 고향이요 본향입니다. 하느님은 변하지 않아도 약속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으니 약속이 아닌 하느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런 깨달음이 깊은 평화와 안정을 줍니다. 바로 뉴튼수도원에 가서도 실감한 사실입니다. 하느님만으로 만족했고 행복했기에 가고 싶은 곳도, 보고 싶은 것도 없었습니다. 어디나 하느님의 집인 성당만 있어 그 안에 머물면 고향에 있는 듯 편안했습니다. 


하여 사람들이 고향을 찾는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아 성당을, 수도원을 찾는 것입니다. 요셉수도원을 찾는 많은 자매들의 이구동성의 말은 '친정집에 오는 것 같다'는 고백입니다. 수도원 고향집이 마치 친정아버지 같은 하느님이 계시기에 나온 자연스런 고백인 겁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아버지 계신 본향집으로의 귀향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이지만 이미 여기 본향집에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하느님은 어디나 계시고 하느님 계신 곳이 참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정주서원을 통해 하느님 참 고향에 영원히 뿌리내리고 사는 분도수도자들입니다. 


바로 오늘 1독서 창세기의 내용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살 수 없는 어둠이 뒤덮고 있는 심연을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으로 만들어 주시는 과정에 대한 묘사입니다. 하느님은 주도면밀하게 혼돈에서 안정과 평화의 아늑한 환경의 가정집 분위기로 만들어 주십니다. 창세기 저자의 고향을 상실한 혼돈의 세상을 반영합니다. 바로 성령의 감도하에 나온 '오래된 미래', 하느님의 집을 향한 향수의 원초적 갈망의 표현입니다. 


똑같은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 지금 여기서 본향을 앞당겨, 맛보며 살게 하십니다. 창세기에서 기본적인 창조과정의 도식은 '말씀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부르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입니다. 말씀에 순종함으로 그대로 되어,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은 균형과 조화의 세상이 되었음을 깨닫습니다. 말씀에 순종할 때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은 바로 지금 여기 본향집에서의 삶입니다. 하느님 말씀의 위력이 놀랍습니다. 똑같은 하느님께서 말씀을 통한 창조는 오늘도 계속 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치유되는 사람들이 상징하는바 복원되는 본향집의 가정들입니다. 창세기의 창조가 재현됨으로 치유를 통한 새창조의 구원입니다.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얼마나 신바람나는 장면인지요. 오늘 창세기의 똑같은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창조활동을 하시니 사람들은 구원되어 혼돈(chaos)의 마을은 질서(cosmos)잡힌 건강한 사람들의 마을로, 고향들로 변합니다.


여기 '구원 받았다(were healed)'라는 희랍어 단어의 의미가 깊습니다. 희랍어 'eszonto'는 육신의 치유 그 이상을 함축합니다. 초대교회의 어휘로 보면 그 말마디는 '구원의 전적인 체험(the total experience of salvation)'의 묘사로 '심신이 모두 건강한 상태(wellness)'라기 보다는 '온전함(wholeness)', 다른 말로 '귀향(coming home)'을 뜻합니다. 

바로 우리의 원고향인 주님을 만남으로 온전한 치유의 구원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합니다. 주님을 만날 때 구원의 고향이요 동시에 온전해지고(whole) 거룩해지는(holy) 우리들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워낙 중요한 말마디들이라 이해를 깊게하기 위해 영어단어를 넣습니다. 


주님은 귀향의 여정 중에 있는 우리 모두를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잠시 천상의 본향집을 앞당겨 맛보게 함으로 온전한 사람, 거룩한 사람으로 치유의 구원을 선물하십니다. 새삼 우리의 진정한 고향은, 성전미사가 거행되는 지금 여기 이 자리임을 깨닫습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시편103.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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