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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9.11.연중 제23주간 수요일                                                                               콜로3,1-11 루카6,20-26

 

 

 

참 행복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어제 참으로 오랜 만에 검정 고무신을 마련해 신게 되었습니다. 예전 여기에서의 수도원 초창기 시절 검정 고무신을 신으며 소박한 행복을 누렸던 기억이 감미롭게 떠올랐고 순간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예전 써놓고 애송했던 검정 고무신이란 시도 생각났습니다.

 

-“볼품 없는 검정고무신/애기똥풀꽃밭에 다녀 오더니

꽃신이 되었다/하늘이 되었다

노오란 꽃잎 수놓은 꽃신이 되었다

노오란 꽃잎 별 떠오는 하늘이 되었다.”-1998.5.1

 

바로 위 검정 고무신이 상징하는 바 오늘 행복선언중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자발적 단순소박한 가난한 삶의 추구는 수도자들에겐 영적본능입니다.

 

오늘 루카복음은 전반부 행복선언에 이어 후반부는 불행선언입니다. 행복선언은 구약성경과 유다교의 고전적 형식으로, 미래에 주어질 기쁨의 예언적 선포를, 현재의 기쁨에 대한 감사를, 그리고 현인들의 권고에서는 보상의 약속을 표현합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한편의 시를 감상하는 느낌입니다. 문득 ‘시처럼 살고 싶다’라는 글이 생각납니다.

 

-“시처럼 살고 싶다/하얀 여백의 종이 위에 시처럼

침묵의 여백의 시공안에 시처럼 살고 싶다

여백을 가득 채운 수필이나 소설이 아닌/시처럼 살고 싶다.”-1998.1.24

 

성서의 가난한 이들, 즉 아나뷤의 노래가 바로 시편입니다. 아나뷤의 영적 후예가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주여 귀를 기울이시어 들어 주소서. 가난하고 불쌍한 이 몸이오이다.” 시편 구절이 생각납니다. 매일 평생 끊임없이 바치는 시편성무일도의 은총이 가난을 사랑하게 하고, 시처럼 기품있고 아름다운 삶으로 만들어 줍니다. 텅 빈 가난에서 샘솟는 맑은 기쁨에 행복입니다. 어제 읽은 시에 관한 좋은 글이 있어 나눕니다.

 

-“한편의 시(詩)를 쓴다는 것, 말(言)이 절(寺)을 만나는 일이다. 말(言)이 절(寺)을 만나야 비로소 시(詩)가 된다. 한편의 시를 쓴다는 것은 저마다 마음속에 절 한 채를 짓는 일이다.---어떻게 해야 사악한 기운을 몰아내고 비로소 무릎을 꿇을 수 있는가?---일주문을 지나 경내를 지나 거쳐 법당 앞에 꿇어 앉은 시는 과연 몇이나 될까.”-

 

누구나 추구하는 행복입니다. 가난한 시인의 행복입니다. 예언자들은 물론 예수님의 삶자체가 ‘하느님의 시詩’였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참행복을 선언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이 아닙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참행복은 여기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굶주리는 사람들, 우는 사람들이 행복한 것은 바로 하느님이, 하느님의 나라가 그들의 배경이 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가난한 이들을 아끼시고 사랑하는 하느님이십니다. 이와 대조되는 불행선언입니다. 불행선언과 함께 봐야 우리가 해야 할 바가 분명해집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위로를 받았다.

블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행복선언과 불행선언이 참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오늘 지금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과연 우리는 어느 편에 속합니까? 행복한 쪽입니까? 불행한 쪽입니까? 앞 행복선언과 밀접히 짝을 이루는 네가지 불행선언은 저주도 아니고 돌이킬 수 없는 형벌의 선고도 아니라, 탄식이며 경고입니다. 

 

곧 회개하라는 권고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이, 자비로운 연민의 마음을 지닌 사람이 회개한 사람입니다. 부유한 사람들, 배부른 사람들, 웃는 사람들, 진정 행복하려면 가난한 이들, 굶주린 이들, 우는 이들과 함께 연대하고 나누라는 것입니다. 이들을 위해 자신을 비우며 함께 하라는 회개의 초대입니다.

 

반면 가난한 이들, 굶주리는 이들, 우는 이들은 위축되지 말고, 누구를 원망하거나 저주할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배경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참행복은 물질이나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이들의 것이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가난하다 다 불행한 것도 아니고, 부자라 하여 다 행복한 것도 아닙니다. 어떤 처지에 있든 인간 품위를 잃지 않고 기품있고 아름답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나라에 희망과 행복을 둘 때 가난하고 굶주려도 청빈낙도淸貧樂道의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고, 부자라 해도 하느님 마음으로 부단히 가난한 이들과 나누며 겸손히 함께 한다면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처지에서든 하느님의 나라에 희망을 두고 인간 품위를 잃지 않고 기품있고 아름답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로 주님은 콜로새서의 바오로를 통해 참행복의 구체적 길을 제시해 줍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오늘 지금 여기에 살되 시선은 늘 천상의 그리스도께 두고 살라는 것입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을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우리는 행복합니다. 가난이, 부유가 우리 마음에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저절로 현세적인 것들을 멀리하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죽이라고 했지만 현세적인 것들로 부터의 이탈과 더불어 다음 부정적인 것들은 저절로 버리게 됩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현세적인 것들, 곧 불륜, 더러움, 욕정, 나쁜 욕망,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 숭배입니다.---이제는 분노, 격분, 악의, 중상, 또 여러분의 입에서 나오는 수치스러운 말 따위는 모두 버리십시오.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현세적인 부정적인 것들이 사라질 때 비로소 참 행복한 삶입니다. 지상에 살 되 하느님께, 하느님의 나라에 희망을 둘 때 저절로 이탈의 삶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이런 삶의 모범입니다. 가난해도 비겁하거나 비굴하거나 위축되지 않고 의연한 삶을, 부자라 해도 겸손하고 순수하여 모두 기품있고 아름다운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한국인이라면 일상에서 지켜야 할 ‘한국인의 미’를 요약한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검이불루(儉而不陋) 화이불치(華而不侈),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는  뜻입니다. 이런 삶일 때 가난하든 부유하든 참 품위 있고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오늘 우리 모두에게 주는 결론 말씀입니다. 우리는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 버리고,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 새인간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모상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지식에 이르게 됩니다. 참으로 무지로부터 벗어날 길도 이 하나 뿐입니다.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모든 이들의 평생과제요, 이런 삶이 참 행복한 삶입니다. 

 

이런 우리 삶의 영원한 빛나는 모델이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우리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은연중 맛보는 은혜로운 현실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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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안젤로 2019.09.11 09:22
    현세적인 부정적인 것들이 사라질 때 비로소 참 행복한 삶입니다. 지상에 살 되 하느님께, 하느님의 나라에 희망을 둘 때 저절로 이탈의 삶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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