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3. 연중 제2주간 금요일(뉴튼수도원 74일째)

                                                                                                                                   히브8,6-13 마르3,13-19


                                                                               거룩한 삶의 놀이

                                                                          -주님과의 친교와 우정-


어제 오늘 말씀 묵상 중 몇가지 깨달음이 생생합니다. 기도하다보면 건성으로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특히 생각없이 반복되는 묵주기도, 성무일도, 주모경 등 수두룩합니다.


'어, 이런 기도가 하느님께 상달되겠나? 제대로 된 기도가 얼마나 되겠나? 대화 중 말 많고 진실성이 없으면 아예 듣지 않듯이 하느님도 이런 기도는 듣지 않으시겠다. 그대로 소음 공해 같은 기도가 아니겠나. 그 많은 기도가 단지 소리들로 끝나는 공허한 기도도 많겠구나. 그럴바엔 하느님 쉬시도록 침묵하는 편이 낫겠다. 아, 기도를 잘하기 위해서 깊은 침묵이 필요하겠구나. 깊은 침묵에서 저절로 흘러나오는 진실한 기도요, 침묵 자체가 하느님 마음에 참여하는 기도이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삼 말로서의 기도이전에 하느님과의 내적 깊은 친교와 일치가 우선이라는 생각이 절실했습니다. 본원에서의 인사명령지를 보던 중 깨달음도 강력했습니다. 나이 70세가 되니 본당 일선 사목에서 물러나 수도원으로 돌아오는 선배수도사제들입니다.


'아, 세월을, 시간을 이길수는 없구나. 세월과 화해하며 사이좋게 지내는 일이 참 중요하겠다. 세월이 흐르면서 저절로 때가 되면 물러나게 되는 구나. 아름답게 퇴장하는 일이, 퇴장후의 삶이 문제구나. 이래야 삶의 무대에서의 마지막 퇴장인 죽음도 아름답게 맞이하겠다. 현직의 삶보다 퇴장후의 은퇴의 삶이 중요하겠다!‘


하는 생각이 가슴을 쳤습니다. 세월 흘러 나이들어가면서 점차 보수(保守)적이되고 안주(安住)하게 되면서 마음의 순수(純粹)도 잃고 분별력(分別力) 역시 무디어 질 수 있겠다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역시 주님과의 긴밀한 내적 친교 중 깨어있는 삶이 얼마나 핵심적인지 깨닫습니다. 


또 하나는 '놀이'와 관련된 깨달음입니다. 사실 예전 어린 시절의 삶은 놀이라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어찌보면 삶은 놀이와 같습니다.


'삶은 놀이, 참 재미있는 생각이다. 놀이는 모두가 재미있어 하지는 않는다. 내 경우는 축구가 재미 없어 축구 시간 내내 재미없이 뛰어다니기만 했고 빨리 끝나기만 기다렸다. 축구가 재미있는 아이들은 축구시간 내내 신나게 뛰겠지만 그렇지 못한 아이들도 많지 않겠나. 교대 시절 무용은 F학점에 재수강 한 적도 있다. 삶의 놀이와 경기도 재미없이 질질 끌려가다가 인생 끝나는 경우도 있겠다. 또 마냥 놀이가 재미있는 것도 아니다. 한 때의 재미있는 놀이지 시간 지나면 놀이 역시 재미없어 질 수 있다. 특히 고령화 시대, 심신이 노쇠하여 가면서 날로 삶의 놀이에 재미를 잃어갈 때가 문제겠구나. 삶은 놀이인데 삶의 놀이에 재미를 잃으면 무슨 재미로 사나?‘


새삼 주님과의 깊은 내적 친교를 통한 주님과의 거룩한 놀이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묵상하니 오늘 말씀의 열매도 풍성합니다. 주님과의 친교와 우정이 문제의 답입니다. 날로 주님과의 친교와 우정이 깊어지면서 주님과의 놀이는 물론 주변과의 놀이의 차원도 달라질 것이며 삶의 놀이의 기쁨과 재미도 살아날 것입니다.


첫째, 성소에 대한 부단한 깨달음입니다.

성소 즉, 부르심에 대한 부단한 깨달음이 삶의 놀이에 대한 기쁨의 샘입니다.

부르심은 순전히 은총입니다. 주님이 먼저 우리를 부르셨기에 주님을 따라 나선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따라 나선 듯 하지만 깊이 들여다 보면 주님이 먼저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역시 부르심의 경우, 삶의 문장에서 주님이 주어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의 사도들만 아니라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 모두에 해당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시어,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부르심과 응답이 한 셋트입니다. 우리의 부르심과 응답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번으로 끝나는 부르심과 응답이 아니라 평생과정입니다. 주님은 매일 우리를 성당에서의 미사와 성무일도에 부르시며 또 수시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바로 이 부르심과 응답의 여정은 그대로 회개의 여정과 일치합니다. 이 부르심에 충실히 응답할 때 비로소 순종과 겸손의 덕이요 주님과의 내적 친교와 우정도 날로 깊어질 것이며 삶은 기쁨의 놀이가 될 것입니다.


둘째, 제자직에 대한 부단한 깨달음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신자들입니다. 제자의 어원은 라틴어로 '배우다(to learn)'는 뜻입니다. 부단히 주님이자 스승이신 주님께로부터 배우고 그 배움을 육화하는 일이 제자들이 할입니다. 주님과 함께 머물면서 말씀의 영과 생명과 빛으로 충전시키는 관상적 공부와 휴식이 기본이며 이 기본에 충실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이래서 성당에서의 미사와 성무일도, 묵상이요 수시로 주님 안에 머무르는 관상기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은 이 점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였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사도직 이전에 제자직임을 깨닫습니다. 주님과 함께 지내면서 배우고 채워야 사도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관상과 활동의 리듬 따라 주님과의 친교와 우정을 깊이할 때 삶은 기쁨의 놀이가 됩니다. 주님은 히브리서에 말하는 대로 '더 나은 약속을 바탕으로 세워진 더 나은 계약의 중재자'입니다. 주님과 함께 머물 때, 히브리서에 인용된 예언서의 새계약이 고스란히 실현됩니다.

"나는 그들의 생각 속에 내 법을 넣어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리라.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주님과의 친교와 우정을 통해 날로 우리 마음 깊에 새겨지는 주님의 가르침의 법이요 하느님의 백성에 대한 깊어지는 자의식입니다. 더불어 증대되는 삶의 놀이의 기쁨입니다.

 

셋째, 사도직에 대한 부단한 깨달음입니다.

관상은 활동으로 표현되기 마련이듯 제자직은 사도직을 통해 완성됩니다. 주님과 친교와 우정의 기쁨을 이웃과 나누는 것이 바로 사도직입니다. 제자직과 사도직은 분명히 구별됩니다. 사도의 어원은 그리스어로 '선교를 위한 파견(to go out on a mission)'입니다. 사명을 띠고 파견되는 것입니다. 주님께 복음을 배우고 치유 받았으면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고 치유의 은총을 베풀어야 합니다. 결국은 우리를 통해 주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다음 대목이 제자들의 사도직에 대한 분명한 언급입니다.


-그들은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다.-


전반부가 제자직에 관한 것이라면 후반부는 사도직에 관한 것입니다. 흔히 베네딕도회 수도자를 '안으로는 수도승, 밖으로는 선교사'라 하는데 바로 위의 대목과 일맥상통합니다. 안으로 주님과 친교와 우정을 깊이하는 제자직의 수도승이요 밖으로는 사도직을 충실히 수행하는 선교사입니다. 이 둘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한 실재의 양면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이자 사도들은 모두 주님하신 것과 똑같이 파견되어 복음을 선포하시며 치유와 구마활동을 하셨습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를 부르시어 당신 복음을 가르치시코 영육을 치유하신 후 거룩한 삶의 놀이 터에 당신의 사도로 파견하십니다.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맙추리라."(시편85,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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