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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6.19. 연중 제12주일                                                    즈카12,10-11;13,1 갈라3,26-29 루카9,18-24


                                                            구원의 길, 생명의 길, 사람의 길


“하느님, 내 하느님, 내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 하나이다.”


방금 간절한 마음으로 불렀던 화답송 후렴입니다. 하느님이 목말라 하느님을 찾아 이 거룩한 생명의 미사잔치에 참석하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구원의 길, 생명의 길, 사람의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복음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먼저 “군중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물으시며 군중들의 반응을 탐색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군중들의 견해가 구구각색 탐탁치 않자 제자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다시 묻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우리 모두를 향한 물음이자 영원한 화두입니다. 예수님은 혼자 고독 중에 기도하시며 자신의 신원을 깊이 깨달으셨음이 분명합니다. 과연 무엇이라 대답하겠습니까? 주님을 바로 믿으려면 주님이 누구신지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신원은 우리의 신원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알아야 나를 알 수 있고, 주님의 길은 바로 우리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수제자인 베드로가 바로 대답했습니다. 마르코 복음에서는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 하는데 루가는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로 고칩니다. 예수님과 하느님간의 긴밀한 관계를 드러냅니다. 베드로의 대답은 맞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십니다. 


왜 그랬을 까요? 불필요한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당시 베드로를 포함한 유다인들은 순전히 현세적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고대하던 메시아는 강자였습니다. 막강한 힘으로 이스라엘 위에 군림하는 왕인 메시아입니다. 강대국의 지배를 수백 년 받았던 이스라엘은, 메시아가 오면 강대국들을 쳐부수고 이스라엘이 세상 만방을 통치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완전히 환상 속의 실현가능성이 전무한 메시아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런 메시아가 아님을 명백히 밝히십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수난과 부활의 예고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수난과 부활의 파스카의 주님 메시아입니다. 이사야서의 수난 받는 주님의 종을 연상케 합니다. 수난의 현장에서 부활의 메시아를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존의 메시아관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부활 후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수난과 부활의 메시아 예수님이십니다. 민중들의 사랑도 받았지만 ‘고난-배척-죽임-부활’로 요약되는 예수님의 삶입니다. 어제 신문에서 읽은 어느 교수의 다음 컬럼 내용도 이런 수난의 메시아관과 일맹상통합니다.


“진짜 성지순례는 인도나 바티칸이나 예루살렘으로 가기 전에 모든 죽어가는 것을 찾아가는 일상이어야 한다. 홀로 사는 노인들, 장애인이나 쌍용자동차 해직자 가족이나 용산참사와 세월호 유가족처럼 지금 죽어가는 이들부터 살핀다면, 바로 거기에 예불과 미사와 예배가 있다. 대통령과 정치가와 시민들이 ‘모든 죽어가는 것’부터 살핀다면 그 순간에 바로 혁명이 시작될 것이다. 당연히 애도에는 마감시한이 없다. 함께 통곡하면 위로가 되고, 연대가 생기며, 힘이 솟는다.”


이런 고난과 수난의 현장에서 부처님을, 메시아 예수님을 만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시며 제자들의 메시아관을 정정하신 후 구원의 길을 제시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라는 복음의 서두 말씀이 중요합니다.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예외없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어제 오늘의 저녁 아침 성무일도 후렴,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도 이 말씀의 요약이었습니다. 영원불변의 진리이자 믿는 이들의 평생 수행을 요약합니다. 누구에게나 보편 타당한 구원의 길입니다. 이 길 말고는 구원의 길, 생명의 길, 사람이 되는 길은 없습니다. 어제 저녁기도 세 번째 후렴도 생각납니다.


“주 예수는 당신 자신을 낮추셨기에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영원토록 높이올리셨도다.”


부단히 자신을 낮출 때, 자신을 버릴 때, 자신을 비울 때 하느님께서는 영원토록 우리를 높이올리십니다. 이 모두에 전제되는바 그리스도께 대한 열렬하고도 항구한 사랑입니다. 이런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이 기쁘게 자발적으로 자기를 비우는, 버리는, 낮추는 겸손의 여정에 항구하게 합니다. 어제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에서 읽은 두 구절이 생각납니다.


“인간이란 그 자체가 위대한 심연深淵이다.”

“마음이 겸손한 사람이야말로 주님이 머무시는 집이다.”


얼마나 깊고 아름다운 구절인지요. 주님 사랑의 동기가 되어 자기를 끊임없이 버려가고 비워갈 때 인간은 위대한 사랑의 심연이 될 것입니다. 이런 위대한 사랑의 심연의 겸손한 영혼은 그대로 주님의 집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심연은 끝없는 어둠의 ‘무無의 심연’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정의에 이어 ‘사람은 사랑이다.’라고 정의하는 성 아우구스티노입니다. 하느님뿐 아니라 인간의 본질은 사랑임을 천명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버림으로’ 완성이 아닙니다. 두 번째 필히 따라오는 요소가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이 또한 주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날마다’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한 두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생활의 항구한 법칙임을 말해 줍니다. 말 그대로 순교적 삶입니다. 내 운명의 십자가, 책임의 십자가를 죽을 때까지 항구히, 충실히 평생 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제 십자가를 지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세 번째 요소가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삶의 유일한 목표요 방향입니다. 그리스도만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아닌 세상의 것들을 따르기에 길을 잃어 혼란이요 방황이요 무수한 유혹에 빠지고 악의 덫에 걸리는 것입니다.


나 혼자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도반들과 함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따릅니다. 오늘 제1독서 즈카르야의 예언은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통해 실현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주님은 우리 위에 은총과 자비를 구하는 영을 부어 주십니다. 


“그날에 다윗 집안과 예루살렘 주민들의 죄와 부정을 씻어 줄 샘이 터질 것이다.”


언젠가의 그 날이 아니라 바로 오늘이 그날입니다. 바로 십자가와 부활의 파스카의 주님을 통해 이뤄지는 성체성사의 은총을 상징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죄와 부정을 씻어 줄 은총의 샘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샘솟는 활력이요, 항구히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은혜로운 진리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모두 하느님 자녀인 도반이 되었고, 우리는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바오로의 고백이 참 은혜롭습니다.


“그러므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우리는 모든 차별이 철폐된 평등한 하느님의 자녀들이며 형제들입니다. 이런 우리들이야 말로 진정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약속에 따른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 된 도반들과 함께 하기에 그리스도를 항구히 충실히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연중 제12주일 우리에게 만고불변의 평범한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파스카의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 제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항구히 충실히 당신을 따를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끝으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라는 자작 좌우명 시의 마지막 연을 나눕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살았습니다.

저희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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