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희생자 304인을 기억하는 광화문 미사 (2015년 1월 21일 수요일.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

by PACOMIO posted Jan 23,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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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 21일 수요일.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


1독서: 히브 7,1-3.15-17 <너는 멜키체덱과 같이 영원한 사제다.>

복음: 마르 3,1-6 <안식일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제목: 영원한 사제이신 그리스도


<도입구>

2015년 을미년 양의 해. 1월 21일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인 오늘, 우리는 세월호 희생자 304인을 기억하는 미사를 봉헌하기 위해 이 자리 광화문에 모였습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희생자는 “김담비” 양입니다. 열네 살의 어린 나이에 순교하신 성녀 아녜스의 생명도, 세월호 참사로 억울하게 희생당한 김담비 양의 생명도 모두 하느님 눈에는 똑같이 소중한 생명입니다. 하느님께서 김담비 양을 비롯한 모든 세월호 희생자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시고, 유가족들에게는 위로를,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들에게는 세상의 “모든 악을 용감히 이겨 내고, 마침내 천상 영광에 이를 수 있는” 은혜를 주시기를 간청하며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본문>

“신부님도 그 뭐냐, ‘정의구현’입니까?”

수도원에선 기도만 하고 수사들은 세상 일에 관심이 없는 줄 알았던 어떤 신자가 놀라며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동안 속았다는 표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께 제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가입서를 낸 건 아니지만, 마음으로는 그분들과 뜻을 같이 합니다.” 솔직히 저는 용기가 없어서 “박근혜, 물러가라” 하고 소리쳐본 적도 없습니다. 겨우 가슴에 노란 리본 하나를 달았을 뿐인데, 이마저도 몹시 불편해하는 신자들을 종종 만나곤 합니다. ‘사제가 왜 정치 참여를 하느냐’ 같은 훈계도 가끔 듣습니다만, 사실 사제들은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사제직은 사제들만 참여하는 게 아닙니다. 사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사제들과 신자들 모두 공통으로 사제직을 수행한다고 해서 이를 ‘공통 사제직’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사제들이 정말 사제다운 사제인지를 물으려면, 그들이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얼마나 잘 수행하고 있는지, 다른 말로 ‘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닮았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너는 멜키체덱과 같이 영원한 사제다.”(히브 7,17; 시편 110,4ㄴㄷ)라고 제1독서 히브리서에서 들었고, 화답송에서 노래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적인 혈통과 관련된 율법 규정이 아니라, 불멸하는 생명의 힘에 따라”(히브 7,16) 사제가 되셨기 때문에 ‘영원한 사제’라고 부릅니다. 혈통으로 엄밀히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레위인의 후손도, 다윗의 자손도 아닙니다. 따라서 그분께는 백성들을 위해 속죄의 제사를 지낼 권한도, 백성을 이끌고 통치할 권리도 없습니다. 하지만 ‘불멸하는 생명의 힘’, 곧 성령의 힘에 따라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영원한 사제’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빼놓고 인간적으로만 예수님을 보면, 그분의 사제직이란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으며 족보도 없고 생애의 시작도 끝도 없는”, 따라서 어디에서 정통성을 찾아야 할지 모를 행위였습니다. 그래서 성전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이 한번은 예수님께 따졌습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또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마르 11,28) 하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이런 식으로 합리적인 문제제기를 할 때마다, 반문도 하시고 비유도 드시면서 당신이 참으로 어떤 분이신지를 깨우쳐주려고 애쓰셨습니다. 그들이 군중이 두려워 예수님의 반문에 대답을 피하면, 예수님께서도 그들에게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마치, ‘세월호 참사를 잊지 말자’고 호소하는 사제에게 신자가 “신부님,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십니까? 주교님께서 신부님이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습니까?’하고 따지고, 사제는 그 신자에게 이리저리 설득을 시도하다가 어느 선에서 그냥 침묵하고 ‘정치 신부’로 낙인찍히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편으론 당시 이스라엘의 현 권력과 맞서기를 피하셨지만, 또 한편으론 그들에게 보란 듯이 안식일법을 어기셨습니다. 안식일법이라는 것이 원래는 사람이 일주일에 하루 하느님 안에 쉬면서 노동의 신성함과 인간의 존엄성을 깊이 묵상하게끔 제정되었던 것이었지만, 인간이 법과 규정 준수에 집착하면서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에 대한 연민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민수기를 보면, 어떤 사람이 안식일에 나무를 주웠다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사람은 사형을 받아야 한다. 온 공동체가 진영 밖에서 그에게 돌을 던져야 한다.”(민수 15,35). 성경에서 이렇게 죽이라고 말할진대, 스스로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하면서 안식일법을 툭하면 어기는 예수님을 보며 이스라엘의 법과 질서를 담당했던 당시 권력자들이 어떤 생각을 했겠습니까? 이스라엘 존립의 근간인 율법을 폐지하고 사회 체제의 전복을 기도하는 저자야말로 정치 종교 모두에서 최고의 위험 인물임이 분명하다, 없애야 한다,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았겠습니까?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법을 어기실 때 즉시 예수님을 고발하고 그러면 군중들이 분노하여 그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를 기대했습니다. 저는 예수님 시대의 안식일법 이야기를 들으면 자동적으로 지금 대한민국의 국가보안법이 떠오릅니다. 둘 다 국가 안보를 추구한다는 중대한 존재 이유로 생겨났지만, 둘 다 국가안보 대신에 실제로는 국민들을 못살게 구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입니다. 요즘 대한민국 사회가 툭하면 종북몰이로 사람들을 고발하고 잡아가두는 것처럼, 예수님도 그렇게 잡혀가고 돌에 맞아 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군중이었습니다. 군중이 예수님을 예언자로 존경했던 것입니다.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빵의 기적으로 배고픈 사람들을 배불리시니 군중이 그분을 왕으로까지 추대하려할 정도로 대중 지지도가 높았습니다. 그러한 군중이 무서워 유대 권력자들은 예수님을 잡아가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으셔야 했습니다. 당신이 죽지 않으시고는 군중이 당신이 정말 누구신지 깨닫지 못하리라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잘 아셨습니다(요한 2,23-25 참조). 목자없는 양들처럼 자기들에게 무엇이 필요한 지를 모르고, 억압받고 있는데 억압받고 있는지도 모르는 그런 군중들을 위해서 대신 죽으려고 결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선 사실 죽으려고 오셨습니다. 그분은 세상에 오신 순간부터 돌아가실 때 까지 철저하게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일,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그 일만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왜? 당신이 죽으셔야지 군중들이 저분이야말로 참으로 오시기로 되어 있는 예언자구나 하고 깨우치고 회개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다가가시며, 사람들의 완고한 마음을 깨우쳐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안식일법을 어기니 고발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이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옆에 있어도 그 고통에 무감하니 당신이 안식일법을 어겨서라도 그들의 무관심과 완고한 마음을 지적해주어야겠다는 생각뿐이셨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하늘 나라의 복음이 선포되고, 백성 가운데 병자들이 모두 나았으나(복음환호송 참조: 마태 4,23 참조), 그럴수록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습니다.”(마르 3,6).


때가 되어, “스스로 원하신 수난이 다가오자”, 예수께서는 빵과 잔을 들고 제자들에게 주시며 ‘받아 먹어라. 내 몸이다.’,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감사기도 제2양식 참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끝으로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이 광화문 길거리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이유입니다. 세월호 유가족을 위로하기 위한 미사 맞습니다. 세월호 유가족들의 고통 앞에서 무감각한 신자들의 무관심과 완고한 마음을 깨우쳐주기 위해 우리가 이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권력자들의 박해와 군중들의 무서운 침묵에도 우리가 좌절할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이런 길이 ‘예수님의 사제직무 수행’이기 때문입니다. 대사제로서 세상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시고”,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히브 5,7-10 참조)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도 그렇게 세월호 유가족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고, 그들 때문에 고난을 겪는 일이 바로 우리의 고유한 ‘사제 직무 수행’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사제가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는 것은 고통받는 이웃을 단순히 소극적으로 기억하는 행위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그것은 세상의 죄를 없애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묻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적극적으로 기억하는 행위입니다. 이는 신앙행위입니다. 정치행위가 아닙니다. 세월호 유가족들과 함께 울어주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며, 그들이 진정한 평화에 이를 때까지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기”(마태 5,10 참조) 위하여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세월호의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우리가 얼마나 더 울어야 할지, 얼마나 더 ‘근심과 번민에 휩싸일지’ 우리는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겟세마니의 예수님처럼 “아버지, 이 잔이 비켜 갈 수 없는 것이라서 제가 마셔야 한다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마태 26,42)하는 마음으로 기도합시다. 그리하면, 우리모두는 세월호와 함께 죽겠지만, 세월호와 함께 부활하여 ‘영원한 사제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